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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비 Dec 04. 2015

11. 혼자가 되니 더 좋아진 것들



"OO야~"


"응? 형!!!!"


 오랜만에 본사로 외근을 나갔다가 입사 동기 형을 만났다. 연수 때는 친했지만, 그 뒤로 그렇게 자주 연락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형이 나를 불렀을 때, 나는 뒤돌아 형을 알아보고는 손을 덥석 잡고 그대로 꽉 끌어안았다. 형도 조금 당황했지만, 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엇, 왜 이렇게 반갑지?!?!?'






 길었던 연애의 끝자락엔 모든 것이 버거웠다. 끝없이 소모되는 감정, 가라앉을 데로 앉아버린 마음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였다. 연애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고, 연애를 끝낼 용기도 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좋은 일이 있어도 기쁘지 않았다. 슬픈 일에도 그냥  시큰둥했고, 타인의 아픔에 마음을 쓸 여력이 없었다. 문제는 그런 시간이 꽤 길었다는 것이다.


 큰 용기를 내 연애를 끝내고 한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냥 회사와 집만 오갔다. 누군가와 연락하는 게 피곤해 집에 오면 핸드폰을 꺼버린 적도 많았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마음을 쉬고 싶었다. 이별의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내 마음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https://brunch.co.kr/@goodrain/3)

마음이 한 번 꿈틀 하고 나니,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나는 그제서야 슬펐다. 이별이 슬펐다. 힘들었던 내 연애가 슬펐다. 그 사람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내가 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는 것이 슬펐다. 내가 혼자라는 것이 슬펐다. 그 누구도 자기 전에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펐다. 함께 들었던 노래가 슬펐다. 그녀가 주었던 책이 슬펐다. 함께 갔던 집 앞 카페가 슬펐다. 그녀와 먹었던 김밥이 슬펐다. 그녀가 좋아했던 소국 한 다발이 슬펐다. 그녀라는 흔적이 묻은 모든 것이 한 번씩 내 마음을 쾅쾅 누르고 갔다.


그리고 동시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다른 감정들도 하나 둘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여자친구와 연애를 하면서 챙기지 못했던 친구들이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적고 직접 연락을 했다. 대부분 6~7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아예 연락이 안 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보고 싶었던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나? 그냥 뭐 꾸준하고 무난하게  회사생활하고 있지. 난 그렇게 업다운이 심한 성격은 아닌가 봐."


"무슨 소리야. 너 되게 예민한 애였는데."



오랜만에 만난 몇몇 친구들에게 예전의 나에 대해서 저런 말을 많이 들었다. 내가 예민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오랜 연애와 직장 생활로 인해서 세상 모든 것이 덤덤해져 버린 나였는데,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정말 오랜만에 듣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듯이, 가라앉아있던 감정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훈 작가의 글을 읽으며  마음속 깊이 감탄하고,

이석원의 산문을 읽으며 마음이 흔들거림을 느꼈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며 가슴 설레는 사랑에 아련하고,

같이 보는 "이터널 선샤인"과 혼자 보는 "이터널 선샤인"이 완전히 다른 영화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세상 모든 이별 노래가 내 이야기 같고,

세상 모든 사랑 노래가 내 이야기가 됐으면 했다.


어느 강연에서 들은 시 한 구절이  마음속 깊이 콱 박혀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있었다.




혼자가 되었기에, 아직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되었다.

퇴근 후에는 문자 한 통 안 오는 날이 더 많기에,

친구와 카톡을 하다가 마무리하며, 나에게 잘 자라고 인사해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깊이 느끼게 되었다.


가족들과 있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직장을 얻고 처음으로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여름휴가를 보냈다.

엄마에겐 15년 만에 가는 제주도.

지난번에 왔을 때는 엄마가 모든 것을 챙겨주셨지만, 이번에는 나와 동생이 엄마를 챙겨드렸다.

엄마는 소녀처럼 어색하고 즐거워하셨다.


나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늘었다.

제대로 된 취미를 찾기 위해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다.

PT 트레이닝도 받아보고, 복싱 학원에도 등록해봤고, 댄스 강습도 받아봤다.

다음달에는 요가와 필라테스를 해 볼 생각이다.

더 멋지고 건강한 내가 되어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나 자신을 더욱 아끼고, 더 가꾸게 되었다.


이렇게 혼자가 되니 더 좋아진 것들이 참 많다.






무엇보다도 글을 쓰게 되었다.


부족함이 없는 마음에선 좋은 것이 나오지 못한다.

글을 비롯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갈구하는 마음, 불균형, 결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들에 더 깊은 울림이 있다.


마침 '브런치'라는 좋은 플랫폼이 있어, 내  마음속에 울리는 문장들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혼자가 된 지금이, 글을 쓰기에 가장 좋은 때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사랑이 시작될 때까지 글을 쓸 생각이다.




(법정 스님은 다 알고 계셨다.)


아, 빨리 절필  선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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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대상 출간, <서른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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