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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Apr 30. 2016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높은 언덕

한 장 소설

   알싸한 꽃향기가 눈을 뜨면 보일 것처럼 주변을 감돌고 있었다. 그것을 계속 맡고 있자니 어쩐지 향 좋은 음식을 앞에 두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그것을 먹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러한 방향성 없는 의식의 흐름은 어느새 태초의 인류에게까지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꽃향기를 맡았던 태초의 인류는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그들은 미각과 후각의 간극을, 꽃잎에선 향기만큼의 맛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누구한테 주실 건가 봐요?

아득히 떠나가는 정신을 다시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화원의 점원이었다. 플로리스트라고 불러야 했던가. 로맨스 드라마에서 희멀건 화장을 한 아가씨들과는 달리 흙이 덕지덕지 붙은 앞치마와 목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봐줄 만한 모습이었다. 아니, 봐줄 만하다 라는 말로는 부족해서 썩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정도였다. 환상과는 다를까 우려했던 현실이 항상 이 정도 수준을 보여준다면 그 세계는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예, 그러려고요.

─받으시는 분은 좋으시겠어요.

좋으시겠어요. 나는 그 말을 혼자 되뇌었다. 그녀의 말은 어딘가 나를 현실과 다른 세계 사이에 자유롭게 집어넣다 빼내는 능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 과연 그녀는 좋아할 것인가,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정말로 궁금해져서 그랬으면 좋겠다고 진심을 담아 답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문학서클에서였다. 검은색의 긴 생머리에 고혹적인 눈빛. 게다가 글도 썩 괜찮게 쓰던 그녀는 당시의 고리타분한 남성적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일종의 신대륙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곳에 방문하는 것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알 수없지만 겪어보지 못 한 무언가를 확실하게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때문에 그녀의 주위는 항상 티 내지는 않지만 그 신대륙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과 그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자 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이원화되어있었다.

   문득 그녀가 불쾌할 정도로 집적대던 남정네들의 모습과 그런 그녀를 아니꼽게 바라보던 시선들이 기억이 났지만, 이내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지금도 나에겐 그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어느 쪽이었는지,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 나는 어느 쪽이었는지.


─읽어봤니?

   그녀가 내게 건넨 첫마디였다. 문학도서 책장에서 우연스레 마주친 그녀는 내게 <단테의 신곡>을 보여주며 물었고, 내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싱긋 웃으며 읽어보라고 내게 책을 건넸다. 그녀가 그 책을 수도 없이 읽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 후로 문학서클에서 그녀가 쓴 글을 몇 번인가 읽고 나서였다. 그녀의 글에는 빠짐없이 '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었다. 어떤 것은 그 책을 따라서, 어떤 것은 그 책과는 다른 그녀만의 생각을 담아서. 그런 그녀의 소설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바로 그녀 스스로도 일련의 '죄'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창문을 열어놔서인지 수선화의 향기가 버스에 가득한 느낌이었다. 한적한 시골의 마을버스 치고는 제법 승객이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꽃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없었는지 재채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잎사귀가 날아가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추스르며, 나는 품 속에서 그녀가 준 <단테의 신곡>을 꺼냈다. 표지에 여전히 대학교의 로고가 박혀있는 이 책은 어쩐지 그 날 반납 대신 변상을 한 뒤로 지금까지 책장 속에 보관해온 것이었다. 마침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책을 쥔 손을 비추어서 마치 그 날, 그녀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오만의 죄인으로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자신(自信)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세계 자체를 넓혀가며 모든 것을 당연하다는 듯 가져가는 모습이 오만이 아닌 탐욕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마침 그녀가 탐욕에 관한 글을 문학서클에 내보인 날이었다.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각인된 수려한 문장과 탄탄한 짜임새를 갖춘 그녀의 글에 대해 당시의 내가 할 수 있는 비평이라고는 존재할 수 없었다. 스스로 느끼는 감정조차 전부 발화로 옮길 수 없는 당시의 나로서는 '글이 예쁘네요'라는 짤막한 감탄사 밖에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한 내 말을 듣고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갈망의 미소가 아닌 오만의 미소. 그것은 짓는 순간 타인의 세계가 자신으로 가득 찰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었다.


   곧 버스가 정지하고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곳이 종점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구태여 묻지 않아도 차고지를 둘러싸고 있는 버스들과 그 주변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기사들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 나는 약도를 펼쳐 들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종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높은 언덕이라고 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높은 언덕. 어쩌면 그녀는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게 있어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사랑에 있어서도 그녀는 완벽해 보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구애의 홍수 속에서도 그녀는 타협 따위 없이 자신이 사랑하는,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집어냈다. 훤칠한 외모, 진하게 우려낸 순수함 밑으로는 미래에 대한 탄탄한 길을 닦아둔 남자로 함께 있으면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절로 뱉어지는 한 쌍이었으니까. 하지만 남자란 생물이 그녀의 생각보다 더 하등─혹은 진화된 생물이었는지 그녀조차 예상 못한 일을 벌이고 만 것이었다. 약혼 삼 개월만에 드러난 남자의 두 살림. 그것은 진하게 우려낸 순수성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찾아온 그 어느 사랑도 놓지 못한 어긋난 결과물이었다.



   언덕에서 볕이 가장 잘 드는 꼭대기에 덩그러니 놓인 완벽한 모양의 구가 지금 그녀가 머무는 곳이었다. 혼자 눕기에는 거대해 보이지만, 영원을 보내기에는 비좁아 보이는 그녀의 무덤은 멀지 않은 시간 내에 누군가 손질을 해놨는지 못나게 튀어나온 잡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그녀의 집을 쓰다듬어보며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당한 볕, 바람, 풍경이 그야말로 집필하기에 완벽한 장소여서 그녀가 무덤 안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잉크와 원고지를 가져올 걸 그랬나.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나니 스스로도 우스워서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즈음 그녀의 세계는 이미 너무나 방대해서 문제에 대한 원인마저도 타인에게 양보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었나 추측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사랑만으로 그를 채울 수 있으리라는 오만, 그가 가진 순수함의 농도를 멋대로 판단했다는 오만. 자신을 오만의 죄인으로 밀어 넣는 것이 그를 증오하는 것보다 편했던 걸까. 때문인지 그녀는 스스로를 물러설 수 없는 죄인으로 밀어 넣은 뒤 스스로를 단죄하였다.


   무덤을 한 바퀴 돌며 술을 뿌리고 나니 알코올 내가 따듯한 기온 때문인지 슬며시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을 맡고 있자니 묘하게 목이 타기 시작해져선 그녀에게 사과를 건넨 뒤 남은 두 잔 정도의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대로 묘비에 기대 누워 조금은 알딸딸해진 느낌을 음미하고 있자니 문득 그녀가 술을 좋아했던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이미 부어버린 것을.

─죽는 순간까지도 오만한 거 아닙니까 누님. 죄를 지었으면 속죄를 해야지 스스로를 단죄하다니요. 그 얼마나 오만한 생각입니까 누님.

   손등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쳐다보니 제법 큼지막한 개미 한 마리가 올라서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보아하니 처음 올라탄 인간의 신체가 제법 당황─혹은 신비스러운지 갈피를 못 잡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듯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쩌면 녀석에게 있어 나의 신체란 것이 일종의 신대륙 같은 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면, 만약 그렇다면 너는 어찌할 것인가. 개척할 것인가, 혐오할 것인가. 나는 잠시 그것을 고민하고, 결론짓고 혼자 웃다가 문득 여태까지 그녀에게 꽃을 전해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새 어딘가 상하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레 이리저리 살핀 뒤 그것을 묘석위에 올려두었다. 바람이 내 쪽을 향하고 있지 않아서인지 향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참, 수선화의 꽃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연히 아실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자기애(自己愛)라고 합니다. 나르시우스라고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고 구애를 하다가 야위어 죽어버린 청년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것이 바로 이 꽃이라고 하더군요. 참... 그 청년도 오만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전부 돌아보지도 않고선 자신의 운명을 단정 짓다니요. 화원에 들러 꽃을 찾는데 누님께 드릴 게 이것 말고는 생각이 안나더군요. 여러모로 누님을 쏙 빼닮은 꽃입니다.

   개미는 여전히 손등을 간지럽히며 떠나지 않고 있었다. 오르지도, 물러나지도 않는 그 모습은 신대륙의 개척자도, 혐오자도 아닌 일종의 방관자처럼 보였다.

─참... 어떤 면에서 누님은 감탄스러운 사람입니다. 끝까지 나한텐 모를 사람인 것 같으니... 그래서 누님은 거기서 잠들고 나는 아직까지도 살고 있나 봅니다. 오만이 죽음의 원인이라면 나는 멍청해서 그 누구에게도 오만할 수 없으니...

   어느덧 햇빛이 더 샛누래지고 이젠 저물 것임을 세계에 통보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것이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햇빛이 따가워서는 아닌데, 왜 이럴까. 개미는 어느새 떠나고 없었다.

─오기 전엔 뭔가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막상 오고 나니 별로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또 벌 받는다 생각하세요 그냥. 누님도 말없이 가셨으니 나도 그래야지. 누님도 그 마음 느껴봐야지.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대답은 없었다.

   나는 어쩐지 쓸쓸해져서는 이젠 정말 가야 할 때라고, 천천히 몸에 붙은 풀데기를 털어내며 묘석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손끝에 어떠한 각인의 형태가 느껴졌다. 일순 찌릿한 전류가 몸을 관통한 것 마냥 전신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글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더듬는 것 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글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더듬어 갈 때마다 생전 그녀와 손이 스치던 순간들처럼 찌릿함이 전신을 통과하는 것만 같았기에, 나는 육안으로 읽는 것을 포기하고선 눈을 감았다. 보이지 않아도 읽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이미 가득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윽고 하나의 문장이 된 그녀의 유언은 이미 오랜시간 전에 내게도 새겨진, 내가 감탄했던 그 문장이었다.

   곧 오래된 동화속 마법사처럼 나는 손가락 끝을 휘적이는 것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꺼진 줄 알았던 내면의 불씨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발화하여 길을 비추고, 그 아래에는 먼지 덮힌 도서관과, <단테의 신곡>과, 그녀와 내가 있다. 그녀는 두꺼운 <단테의 신곡>을 전부 외울 듯 노려보고 있고, 나는 책장속에 숨어 그녀를 바라본다. 이윽고 그녀와 나는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웃으며 소리 없이 입을 연다.


   눈을 뜨니 이미 해는 지평선 끝자락에 반 쯤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어쩐지 나는 비평을 해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 우리의 규칙이었다. 글을 읽은 이상 비평을 해야한다는 것. 비록 그것이 전에 읽었던 글일 지라도. 이미 떠난 줄 알았던 개미는 어느새인가 어깨에 올라서 있었다. 녀석의 신대륙 탐험은 끝났고, 이젠 다시 새로운 여행을 떠날 차례일 것이다. 어렵사리 묘석에서 손을 떼어내고 나는, 소리 없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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