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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Apr 02. 2016

건배

한 장 소설

 

  눈을 떴을 땐 이미 서너 정거장이 지난 후였다. 이젠 망각에 익숙해진 탓일까. 나는 의외로 침착하게 혹여 떨어뜨린 물건이 있을까 앉았던 자리까지 훑은 뒤에 천천히 열차에서 내렸다. 왕십리역이었다. 의미 없을 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이곳에 올 때면 늘 그렇듯 왜 하필 왕십리인가 다시 되뇌었다. 첩첩산중에서 철책선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와의 만남을 되뇌던 것이 어제 같은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어젯밤의 꿈같노라고 혼자 실실 웃어넘기며 반대방향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에서 내린 뒤에도 발 디딜 곳 없는 늦은 밤 막차 버스에서 미역처럼 십여분 가량을 더 나풀대다 내리니 지구 중력의 두 배인 어느 외행성에 도착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몇 발자국 터벅터벅 걷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뒤돌아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병을 꺼냈다. 맥주 한 병 들고 가로등도 꺼진 골목길을 걷다 보니 옆의 놀이터에 누군가 혼자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나는 그곳에서 마실 생각도 없었음에도 무엇인가 뺏긴 것만 같은 허탈감이 느껴져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목을 축이고 싶었다. 답답함이, 텁텁함이, 구멍 난 가슴속 어딘가에서 블랙홀처럼 나를 빨아들이는 공허함이 나를 목 조르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도망치듯 달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손이 괴사 할 환자처럼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칠흑 같은 어둠이 나를 반겼다. 우주 미아처럼 시각도 청각도 멎은 그 어둠 속에서 안식을 느낀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그럼에도 나는 별 빛 하나 없음에도 잠들지 않는 바깥의 도시보다 이곳이 편했다. 나는 손을 몇 번 더듬어 냉장고에 붙은 병따개를 집고 맥주를 따냈다. 뛰어오는 동안 흔들렸는지 맥주가 흘러내려 손바닥에 끈적함을 안겼지만 나는 그저 맥주만을 들이켰다. 마치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그것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들이켜 댔다. 입가에 더럽게 흘러내리는 액체를 촉감으로 훑으며 끝끝내 혐오하던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우스워 나는 정신병자처럼 웃었다. 아랫집에서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 즈음까지 낄낄거리며 웃다 나는 남은 병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 그렇게 혐오했음에도 벗어날 수 없는 걸 보니 내가 당신 아들인 건 확실하노라고 낄낄거리며 이 땅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에게 건배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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