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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Mar 28. 2016

커피가 달다

한 장 소설

  

   이어폰의 음량을 높여 외부로부터의 소음을 차단해도 체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신체의 진동음은 어찌하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울리는 이 소음은 아마도 내가 몸을 실은 전동기차의 진동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이어폰 바깥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기계음에 몸을 일으켰다. 종로 5가에 다다르면 굳이 안내방송을 전부 듣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종로5가역 만의 미세한 철로의 굴절까지도 내 몸이 체득해서인지 모르겠다.


   대학시절 언젠가 교양 삼아 영상학과의 수업을 들어본 적이 있다. 딱히 교양에 지대한 발전을 주지는 않았지만, 촬영에 있어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중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계절에 따른 명도의 차이다. 지리적 특성상 지구의 공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빛의 각도와 양의 차이가 그 원인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계절에만 찍을 수 있는 영상이 있다는 것이었다. 문학적으로는 ‘그 나이에만 쓸 수 있는 문장이 있다.’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걸 알지 못해 가을의 명도로 풋풋한 로맨스 영화를 찍어버려 학점은 날려버렸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수업에서 얻게 된 질문이 썩 마음에 들어 학점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명도의 차이가 계절에 따른 감정 기복을 유발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렇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는 그러한 명도의 차이가 감정 기복에 영향을 끼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사한 햇살뿐만 아니라 피어나는 꽃과 따스한 온기가 봄만의 감정을 복합적으로 형성하듯, 시월 역시 조금 바랜 빛의 명도만이 우중충한 감정을 형성해내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풍경과 사람들의 옷차림 등이 어우러져 복합적으로 감정을 형성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내 경우엔 색 바랜 낙엽들이, 그리고 그것들이 구르는 소리가 가을만의 감정 기복을 주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로 5가는 내게 가을의 거리다. 거리에 수 놓인 사람의 얼굴만 한 플라타너스 낙엽은 그 크기만큼 땅을 구르는 소리 또한 묵직하고 또 위협적이며, 오래된 거리는 발랄한 거리들이 갖는 가을의 이질감과는 다른 통념적인 가을의 분위기와 냄새를 풍긴다. 새로운 건물을 짓고, 새로운 향수를 뿌려도 지울 수 없는, 마치 노인의 체취와 같이 이 거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냄새는 어쩐지 이별의 냄새 그것을 닮았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지수는 창가 근처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며 연습이라도 한 듯 균형적으로 틀어진 상체의 각도와 이젠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만의 하얀 피부가 어쩐지 갓 만들어진 초점 없는 석고상처럼 보였다.

   자리에 앉아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건네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기에, 나 역시 창가로 고개를 틀어 지수가 바라보고 있을 법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잎을 반쯤 게워낸 플라타너스, 옥상에 올라선 비둘기, 바바리코트를 입은 시민들. 너도 그곳에서 나와 같은 냄새를 맡고 있는 걸까. 잔이 나온 뒤에야 지수는 고개를 내게 돌렸다.


"달의 후면에 대해서 알아?"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백해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역시 여행을 갔다 온 터라 살이 전보다 조금 탄 듯 보였다.

"망원경으로 확대한 사진을 보면 정면도 그다지 예쁘지는 않지만, 후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지독하게 못생겼어. 환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봤다간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을 꺼내며 달의 뒷면이 다시금 떠올랐는지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구멍 비슷한 그 자국들은 소행성들이 충돌한 흔적이래. 생성된 이후로 우리가 전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소행성들과 충돌해왔겠지. 재미난 것은 우리가 바로 그 징그러운 충돌 흔적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점이야. 그 소행성들 달 없었다면 곧바로 지구를 향했을 위험한 것들이었으니까. 달이 지구의 방패 역할을 해주고 있는 셈이지. 특히 달의 동쪽 바다라고 불리는 곳에는 한눈에 들어올 정도의 큰 충돌 흔적이 있어. 제법 큰 소행성이었던 거지. 그게 지구에 닿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 가늠해보았다. 먼저 그 소행성은 높은 확률로 바다에 빠질 것이다. 전체 면적으로 보았을 때 지구는 칠 할 이상이 바다로 구성되어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육지 어딘가에 떨어지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이 내 근처로 떨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것이다. 어쩌면 나와 네가 만난 그 가능성보다도 더.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혐오스러워도 더 오래 그 흔적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더라. 우리에겐 감사한 상처인 거지. 그래서인지 그걸 바라보고 있자면, 달의 아픔이 전해지는 것만 같더라고. 얼마나 아팠을까 하고 말이야."

그쯤에서 나는 처음으로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시커먼 액체에서는 쌉싸름한 맛과 향이 났다. 좀처럼 쉽게 가시지 않는 그것들을 곱씹으며 나는 달과 충돌한 소행성들의 출처를 찾듯, 커피콩의 출처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것은 높은 확률로 남미에서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보았던 아마존 관련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지구의 폐라고 불리는 아마존은 불법 벌목으로 인해 앓고 있었다. 그곳만큼 투자하기에 저렴한 땅은 찾기 어렵다 보니 많은 벌목꾼들이 나무를 자르고 목장이나 농장을 차려 방목을 하거나 식물을 재배한다. 그리고 그 식물들 중에 커피콩도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내 입가에 머무는 향이 그러한 불법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러한 상상은 입가에 머무는 맛과 향을 변질시키고 있었다. 지구의 폐라는 곳에 불을 질러서 만들어 낸 향인 것이다. 폐에 불을 지른다. 그것은 일종의 종말의 냄새다. 그리고 그 종말이 아득한 목소리로 곁에서 말하고 있다. 상처가 누적되어 왔다고. 시간을 가지며 돌아보니 달의 뒷면처럼 끔찍한 상처들만이 가득했더라고. 한 번 알아챈 이상 이제 그 아픔을 매번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자신의 잔에 눈물을 채워 넣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달과 커피에 대해, 그리고 어쩌면 그 둘이 만나게 될 먼 미래에 대해 상상했다. 어쩌면 생 택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그곳에선 달에서 커피를 재배하고 있다. 수많은 흉터 위에서 돋아난 커피콩은 무슨 맛과 향을 낼까. 어쩌면 네 잔이 그 맛에 근접해있을지도 모른다. 상처뿐인 그 땅 위에서는 시럽 대신 눈물을 넣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만약 그렇다면, 우린 그 맛을 뭐라 불러야 할까. 달에서 났으니 그래, 커피가 달다고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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