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문득 건너편에 서있는 여성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 두 겹의 스크린도어에 가려 대상이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윤곽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당장이라도 철로를 가로질러 다가가고 싶다는 충동이 온 정신을 빠르게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47. 오늘 죽음을 떠올린 횟수다. 아직 하루가 저물기에는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두어 번 더 한다면 시간당 두 번쯤 죽음을 떠올린 셈이다. 그리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리 적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단지 죽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나의 죽음 기도는 좀 더 상세한 상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오늘 47개의 각기 다른 죽음법을 상상했다. 새벽녘 잠들기 전엔 클리셰처럼 가스를 틀어놓고 수면제를 한 통쯤 털어먹는 장면을 그렸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그대로 창문으로 뛰쳐나가는 상상을 했다. 후자는 사인 조사 결과가 몽유병으로 밝혀질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봐도 상당히 즐거운 방법이었다.
물론 굳이 자살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자살이 결코 나쁘지는 않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더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 나는 쓸쓸한 단독 죽음보다는 공동의, 즉 인류의 동시다발적 죽음이 좋았다. 가령 지구가 회전을 멈추는 것처럼 말이다.
지구가 회전을 멈춘다면 그것이 자전이든 공전이든 인류의 멸망은 확실하다. 자전이 멈추고 공전만이 지속된다면 인류는 자전 속도로 추정되는 약 1674km/h 만큼의 충격을 받아 즉사한 채로 허공을 날아다니거나 건물 등의 구조물에 부딪혀 산산조각 날 것이며, 공전이 멈추고 자전만이 지속된다면 지극히 짧은 시간 내로 모든 생물체가 녹아내릴 것이다. 태양의 중력에 원심력으로 버티고 있던 기존의 상태에서 중력만이 남아 태양에 빨려 들어갈 테니까. 만에 하나 자전이 아주 느린 속도로 멈춘다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세계는 영원히 태양을 마주할 불지옥과 그렇지 않은 빙하시대로 이원화되고, 그렇게 불지옥과 빙하지역을 피하여 즉, 멈춰진 면의 중앙을 경도 0°로 보았을 때 동경과 서경 90° 부근으로 모여든 인류는 붕괴된 생태계 속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해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할 테니까. 물론 그 마저도 지구의 자기장이 사라짐에 따라 직접적으로 받게 될 태양풍에 휩쓸릴 시한부 인생임은 분명하다.
언젠가 학창 시절 불량한 아이들의 담뱃불 속에서 타들어가던 개미를 떠올리며 나는 다시금 건너편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잠식해가던 충동은 어느 정도 물러갔으나, 나는 그러한 사유의 과정이 궁금했다. 용암에 잠식당한 폐허에서 그들의 죽음 이전의 삶을 엿볼 수 있듯, 사유의 과정을 탐색하는 것은 스스로도 모를 무의식적 사안들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니까. 물론 궁극적 목적이 그러한 과정 속에서 연명을 포기해야 할 결정적 이유를 발견해내는 것임은 당연하다.
그래서 떠오르는 순서대로 절차화해 보자면, 먼저 성적인 이유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윤곽조차 흐릿하고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특히나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은 대상에게 원초적인 충동을 느낀다는 것은 내게 있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 역시 아닐 것이다. 내게는 자식이 하루 47번쯤 웃으며 살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지극한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가 온전히 살아계시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녀에게 집착하도록 만드는 것인가. 열차 하나를 보내면서까지 나는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곧 열차가 들어올터였기에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나는 나머지 죽음법을 상상할 모든 정신적 에너지까지 쏟아서 그녀와의 연결점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이윽고 열차 두 대가 나란히 들어와 좁은 선로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열차에 올랐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에 나 역시 빠르게 내 선로의 열차에 올라서서는 창가를 통하여 반대편 열차를 살펴보았다. 곧 무채색의 흐릿한 윤곽이 색채감과 함께 뚜렷이 드러나며 나는 그녀였던 대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좀 전의 윤곽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허나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이내 열차 내에 안내음이 울리고 그녀와 내가 탄 열차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각자의 방향을 향해 서서히 몸을 떨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이 인파를 헤쳐가며 열차 안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와 함께 멀어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쫓을 수 있는 것은 지독하리만큼 현실적 이게도 정확히 열차의 세 칸 까지였고, 그녀가 탑승한 열차는 덜컹이는 구슬픈 소리를 남기며 빠르게 멀어져갈 뿐이었다.
그 후로 집으로 돌아와 마저 채워야 할 죽음법도 떠올리지 못한 채 멍하니 불 꺼진 방안의 벽지를 바라보며, 나는 어쩌면 이 정체 모를 감정이 연명하는 내내 따라붙는 것은 아닐는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나 그것에 대한 해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것에 대한 내게로 찾아왔다.
반쯤 감긴 눈으로 출근한 직장에서 한 사원이 죽었다는 여사원들의 속삭임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어젯밤 내가 열차를 기다리던, 반대편 윤곽과 정체모를 감정에 빠지던 그 시간에 열차 내에서 이유 없는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커피를 타던 컵조차 치우지 않고 허겁지겁 자리로 돌아와 해당 기사를 검색해냈다. 정확히 내가 서 있던 그 시간이었고, 들은 대로 반대편 열차였다. 사망자는 남성 2명 여자 1명. 나는 빠르게 애용하는 커뮤니티 사이에 접속했다. 죽음을 연구하는 그곳이라면 벌써 사건 현장 사진이 돌아다닐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그러했다. '4호선 살인사건'이라는 글이 첫 페이지에 보였고, 나는 빠르게 그것을 클릭했다.
피로 물든 채 누워있는 남성 두 명과 마찬가지로 피로 범벅된 흰 색 셔츠와 연분홍 테니스 스커트의 여성의 사진. 사진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빨려나간 듯 몸에 최소한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주의를 주러 온 듯 인상을 잔뜩 찡그린 과장에게 월차를 내겠노라고 말하고선 회사를 빠져나왔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어제 그녀가 서 있던 그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 진행방향에서 세 번째 칸. 곧 열차가 들어오고, 어제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서, 그녀가 잡고 있던 손잡이를 움켜쥔다. 열차는 냉방중이지만 손에 물든 식은땀으로 인해 끈적함이 느껴진다. 그 이질적인 감각에 갑작스레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감당할 수 없는 진동은 나의 목을 젖히고 그 찰나에 어쩌면 나는 몸이 썩어 들어가기 전까지 연명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번뇌처럼 전신을 뚫고 지나갔다.
사지의 끝자락은 서 있기 조차 힘들 정도로 저려오고, 나는 그것을 버티지 못해 열차의 첫 칸으로 비틀대며 달려가 기장실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발로 차대며, 빌어먹을 열차의 냉방이 너무 차가운 것 아니냐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