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겁이 났지.
여행을 떠난 지 2년, 이제야 쓰는 늦은 여행일기
퇴사를 3년간 준비했어. 입사 때부터 퇴사를 꿈꿨거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여행을 가자! 라는게 내 이십대의 모토였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회사를 관두겠다고 말을 꺼내기까지 며칠을 끙끙 앓았어. 드디어 원하던 목표치의 돈을 모았고 떠나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야.
겁이 났어.
작년 요맘때에는 여행이 그리워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마저 너무 괴로웠거든. 회사를 관두기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었어. 여행만 떠나면 칠레의 어느 곳에서 심한 복통을 앓아도, 로마의 어느 골목에서 길을 잃더라도 행복할 것만 같았어. 안 가본 그곳들이 절절히도 그리워서 힘이 들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행자금을 모으기 위해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지낸 1년의 시간들은 나를 무뎌지게 만들더라. 나는 변하지 않을 마지막 사람이라 생각했는데도 말이야.
결혼은?
돈벌이는?
돌아오면 직업이 있을까?
그럴듯한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멍청이 같은 선택은 아닌 걸까?
서울이란 삭막한 땅에서 두발 붙이고 꿋꿋이 더 살아내야 하는 건 아닐까?
나의 노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떠나지 않은 자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삶을 살게 되진 않을까?
내가 나를 원망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만큼 자란 걸까?
아니면 늙어버린 걸까?
불안감은 커져 가고 확신도 옅어졌어.
그런데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회사에 관두겠단 이야기를 꺼낸 건 다 봄 때문이야.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잔인한 봄은 나를 세상으로 세상으로 불러냈어. 겨울 자락의 찬 바람에 묻힌 봄냄새는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어. 또 이렇게 한 해를 보낼 순 없다고 생각했지. 또 한해를 이렇게 보내고 나면 다시는 떠날 수 없는 사람이 될 거란 생각도 들었어.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나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사람들 주변을 이방인처럼 떠돌았거든. 물론 일은 나쁘지 않았어 심지어 재미있어서 신나게 즐기기도 했어. 근데 시시하게 늙고 싶진 않았어. A와 B의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이 B를 선택해서 실패했다면, A에서도 성공할 수 없었을 거래. 삶에는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래. 그러니까 내가 선택한 길을 정답으로 만들면 된대.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을 여태껏 걸은 적이 없던 거야.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정답지 안에서 골랐을 뿐.
내가 선택한 삶을 정답으로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 근데 해봐야 할 일이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자기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해. 그렇지 않고서 행복해지길 바라면 그건 못된 심보라고 생각해.
난 내 행복을 찾아 나설 거야.
행복해질 거야.
내 인생의 무게를
내가 짊어지고
걸어갈 거야
힘차고 씩씩하게
그래도 씩씩하게 걷자.
그렇게 힘차게 떠나온 여행. 젤 좋아하는 영화 '쇼생크 탈출' 마지막 장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하와이로 날아갔고 에매랄드 바다를 보며 매일, 매 순간을 즐겼어.
아직도 그 질문들에 답을 할 순 없어. 무엇을 해서 먹고살 수 있을지, 결혼은? 같은 것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나는 내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니?"라는 질문엔 "응"이라고 힘차게 대답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난 뭐든 잘 할 거라는 자신감도 충만해. 그 정도면 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