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내리던 밤 퇴근길 풍경 속에서
지난 23일 밤 10시경, 부산에 역대급 폭우가 내리는 중에 상습 침수 구간인 해운대 벡스코 인근 도로 모습이다. 그 날 이후로도 거의 매일 비가 내렸고 오늘(29일)도 거세게 비가 쏟아졌다 잠시 멈췄다를 반복하고 있다.
그날 도로를 완전히 덮은 빗물은 움직이는 차들로 인해 마치 파도가 일듯 출렁거렸고 어떤 차들은 아예 바퀴까지 잠겨서는 극극 토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속에서 눈에 띄었던 다채로운 풍경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꼬리물기를 하면서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지로 가려는 차량들로 인해 막혀버린 버스 전용 차선이었다. 물고 물린 채로 앞으로도 뒤로도 못 가고 멈춰 있던 탓에 내가 탄 버스도 오래도록 서 있어야 했다. 중년의 두 승객은 차창을 열고 욕을 했고 기사 역시 길을 트달라는 격한 손신호를 보내고서야 겨우 나아갈 수 있었다.
다음은 교복을 입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녀 둘. 궂은 날씨에 투덜거리면서 버스에 올라 바로 내 앞에 앉았는데 벡스코 부근에 도착해서 물난리가 난 도로를 보면서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친구들에게 현장 생중계를 하며 과장되게 우는 척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기도 했는데 진짜 겁을 먹은 듯도 했지만 동시에 재밌어하는 것도 같았다. '세월호'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힘겹게 물길을 달려오던 차들 중 일부가 엔진에 물이 들어가 아예 서버린 모습. 우리 버스가 지나갈 틈도 없이 택시와 자가용 여러 대가 정지해 있어 그렇게 또 한참이나 대기해야 했다. 그 가운데 방송국 기자들이 나와 영상을 찍고 인터뷰를 시도하기도 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힘을 합쳐 차들을 밀어 공간을 만든 다음에야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까지 절반쯤 남은 수영역 인근에서 또다시 버스가 멈췄는데, 아예 운전을 포기하고 밖에 나와 있던 몇몇 기사 중 한 분이 우리 차로 와서 몇 미터 앞 주유소 앞에도 고장난 차들이 서 있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으니 가능하면 지하철로 갈아타라고 조언했다. 그에 따라 나와 여학생 둘 그리고 몇몇 승객이 더 차에서 내렸다.
지하철 역시 여느 때보다 더디게 왔는데 타고보니 그 안에도 제각각이 다양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아마도 호우로 인해 일을 할 수 없게 된 탓에 집이나 회사로 돌아가는 듯한, 야광색 제복을 입은 젊은 미화원이 있었고, 무려 이런 날씨에 어디서 뭣 때문에 그렇게나 술을 마셨는지 모를 또다른 청년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노약자석 한줄을 전부 차지하곤 잠에 빠져 있었다. 서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다리를 있는 대로 쩍 벌리고 자신의 책가방을 바로 옆 좌석에 올려놓고 게임에 빠진 남학생도 있었다.
많은 풍경들 속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를 꼽자면, 제일 위험했던 구간이었던 해운대 벡스코 앞 침수된 도로를 지나가던 오토바이 배달 남성이었다. 헬멧 안으로 반쯤 보이는 얼굴이 이십 대를 갓 넘었거나 더 어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차도 못 가는 그 길에 청년은 오토바이에 앉은 채로 쏟아져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가 신호가 바뀌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날씨에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야 오죽 편하겠냐만은, 그것이 가능하려면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누군가가 고생을 하고 큰 위험에 처할 가능성마저도 있음을 생각지 못하는 게 야속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안 좋은 것만 있지는 않았다. 세상이 아직은 멈추지 않고 굴러가는 이유일. 누군가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힘을 합쳐 고장난 차들을 보다 안전한 자리로 밀어주었고, 철없는 말괄량이 같던 소녀들은 지하철역 위치를 묻는 어른에게 "우리랑 같이 가세요"라며 상냥하게 안내를 했고, 기사는 자신의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빗속 운전 요령을 몇 번이나 당부했으며 또 지하철역의 누군가들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한 줄로 서서 침착하게 걸었다.
큰 비에 휩쓸려가거나 가라앉아 영영 잃어버려선 안 될 일상의 귀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그중에서는 한치 앞이 안 보이고 한시가 급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놓지 않는 한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있는데 바로 자신의 양심과 타자에 대한 배려겠다. 부디 비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들이 더는 없길 바라며 어느 순간에든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지켜야 하는 것들은 꼭 지켜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