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에 꽃말이 있다면

여섯 번째 키워드 <흔적>

by 안진진

세수를 하다가 볼 쪽에 뾰루지가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육안으로는 불그스름하게 튀어나와있으며 만지면 딱딱하고 욱신거리는, 피부 안에 염증이 찬 속여드름이었다. 거슬리는 염증 덩어리를 발견한 순간 곧장 드럭 스토어에서 흔적 패치와 크림이 묶음으로 들어있는 제품을 담았다. 새끼 손톱 보다도 작은 무언가를 없애기 위해 2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지출하는 게 맞나 갸웃하지만 일단 없애버려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제거 작업에는 몇 가지 단계가 따른다. 세안 후 기초 스킨케어를 마무리한 다음 여드름이 올라온 부위에 흔적 크림을 발라준다. 6개 묶음으로 된 흔적 패치 중 하나를 떼어, 천천히 스티커를 벗겨낸다. 패치에 붙은 미세 침이 톡하고 염증을 터뜨린다. 피부가 따끔하며 쓰라린다. 이 단계를 며칠 반복하다 보면 어느 날 붉은 염증 대신 거뭇한 자국만 남는다. 어쩐지 여드름보다도 더욱 거슬린다.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존재하는 듯한 오묘한 형태. 색이 연해질 때까지 크림을 성실히 바른다. 새살이 차오르고, 이 자리에 뭐가 있었나 싶어지는 날이 올 때면 흔적 패치는 역할을 다한다.


흔적이라는 단어는 어쩐지 그 자체로 기구한 느낌을 준다. 실수로라도 흔적을 만들어낸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내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이고, 그것을 좇는 이는 저 너머의 원인을 뿌리 뽑기 위해 남겨진 것을 예리한 눈으로 살핀다. 여드름 흔적은 물론이거니와 수상한 거래의 흔적, 불륜 흔적, 위장 흔적, 화재의 흔적. 비슷한 발음을 가진 훈장과는 무언가 남는다는 점만 같고, 전혀 다른 취급을 받는다. 단어도 미움을 받나, 생각해본다.


그러자 동시에 나에게 남겨진 또 다른 흔적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어떤 것이라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 <X>의 흔적. X에서는 흔적이 동의나 호감의 표시가 되기도 한다. 이 세계에서는 누군가가 작성한 글에 공감하거나 재미를 느낄 때, 혹은 친근함을 나타내고 싶을 때 살포시 누르는 하트를 '흔적'이라고 말한다. 이 생태계에 익숙해지기 전, '친해지고 싶은 분께 흔적 남길게요'라는 말에 낯설지만 반가운 생경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흉터를, 혹은 증거를, 때로는 잘못을, 급기야 본심까지 지워내기 바쁜 세상에서 의도적으로 마음을 남기겠다는 선언은 제법 산뜻하게 다가온다.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호감의 시그널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마음에 든다. 상념이 여기까지 미치자 흔적이 마냥 숨겨지는 존재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른다.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다 마무리 할 무렵 지금까지의 대화가 즐겁고 유익했다는 제스쳐의 하트, 얼굴도 본 적 없는 이들이 남긴 글을 진지하게 감상하고 남기는 잘 읽었다는 의미의 하트, 용기가 필요한 발언을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한 이에 대한 존경의 하트.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라는 정의대로라면 우리는 매일 누군가에게 작은 애정이 담긴 흔적을 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그 중 한 번 남게 되면 제법 오래 들여다 보게 되는 흔적이 있다. 평소 SNS를 통해 근황 정도만을 확인하고, 교류는 없는 이로부터 접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게시물에 도달한 하트. 40% 정도의 의아함과 60% 정도의 반가움을 품고 무엇을 향한 하트인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게시물에 대한 공감? 나에 대한 호의? 멀리서 보내는 안부? 혹은 의미 없는 손짓? 의도에 관계 없이 보내온 마음은 제법 오래 머문다.


반대로 내가 발신자가 되는 흔적도 있다. 사적으로 연락을 하진 않지만 내심 가까워지고 싶었던 이의, 나와는 아무런 접점 없는 게시물에 소심하게 눌러보는 하트. 수신자는 신경도 안 쓸 이 작은 표식 하나가 깊게 잠든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일처럼 어렵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렇게 보낸 하트가 어느날 부메랑처럼 돌아오거나 인연으로 이어지면 그 흔적은 꽤나 근사한 훈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흔적이라 발음했을 때 연상되는 부정의 이미지를 지워낸다. 대신 '좋아해요'라는 꽃말을 붙여본다.


앞으로의 인생도 대체로 이런 방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덮고, 가리고, 숨기고, 지워내고, 닦아내는 대신 드러내고, 표현하고, 고백하고, 감탄하고, 격려할 수 있는 삶. 사랑하는 마음이 곧 흔적이 되는 삶. 흔적과 훈장이 구분되지 않는 삶.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면 자꾸 사랑을 이야기 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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