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키워드 <동네>
얼마전에 복싱장 코치님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게시물 한 개를 공유하고는, 큰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안 돼, 오지마!!!
뭔가 싶어 들여다 보니 봄이 오면 가야 하는 성북천 야장 맛집을 정리한 매거진 게시물이었다. 지금은 운동을 잠시 쉬고 있지만, 한창 복싱에 빠져 있을 때 시끄러운 체육관에서 코치님과 나눴던 사담이 떠올랐다. 나는 성북구가 너무너무 좋다며 허허 웃던 바보 같은 표정도.
운동을 하다 잠깐 쉬는 시간이 생기면 코치님은 좋아하는 동네 맛집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당시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도 마땅히 없는 운동 코치와 회원 사이 체육관을 둘러싼 동네 이야기 만큼 적당한 스몰토크 주제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자신의 '먹스타그램' 계정까지 보여주면서 주변의 각종 식당들을 추천했다. 그러면 나는 뭉친 근육을 풀면서 여기도 가봤냐, 저기 맛있냐 의미 없는 질문을 하곤 했다. 사실 좀 더 쉬고 싶은 마음에 시간을 끈 것도 있지만 다니고 있는 회사에는 동네의 맛과 멋을 공감해줄 같은 구민이 없어서, 거주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교집합을 찾는 대화는 제법 반갑고 즐겁기도 했다.
코치님 말대로, 우리 동네는 군침 도는 가게들이 많다. 어느 동네라고 안 그렇겠냐만은 성북구에는 유독 터를 잡은 지 오래된 가게가 많다. 고려대부터 한성대, 성균관대, 국민대, 성신여대 등 꽤 많은 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대학가 근처에 맛집이 많다는 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가리는 것 없이 대부분 잘 먹는 편이다 보니 나만의 맛집 리스트가 딱히 없는 편임에도, 성북구에 산 지 25년이 넘어가니 이곳을 한정해서는 '수다맨'처럼 평균 이상의 맛집을 읊을 수 있다. 초등학교 때 영어학원 가기 전 자주 찾았던 갈비탕집과 돼지불백집, 사회인이 된 사이 분점이 세 개나 더 생겨버린 보쌈 국수집, 로고 박힌 빵이 제일 맛있는 빵공장, 알바비가 전부였던 대학생 때 저렴한 한 끼를 책임진 제육볶음집, '양꼬치와 칭따오' 조합을 알게 된 후로 50번은 방문했던 것 같은 양꼬치 가게 등.
그 중에서도 요근래 가장 즐겨 찾는 곳 중에 하나는 코치님이 오지 말라고 울부 짖었던 성북천이다. 사실 이 곳은 먹기 보다 걷기 위해 많이 간다. 코스는 기분에 따라 그날 그날 달라진다. 성신여대에서 출발해 보문을 따라 걸을 때도, 반대 방향인 한성대를 향해 걸을 때도 있다. 어느 여름에는 영원히 직진을 하다가 종로 청계천까지 도착해버려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희한하게도 이곳을 걷다 보면 계절의 좋은 면만을 기억하게 된다. 고개를 꺾어 들고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들, 천을 둘러싸고 메아리처럼 울리는 매미 소리,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유유자적하는 왜가리와 쇠백로, 한해를 정리하기에 이보다 더 아늑한 곳이 없는 보문천 앞 작은 카페까지. 특히 해가 눈에 띄게 길어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에는 동네 친구들을 꼬셔 강을 보며 구운 고기와 맥주를 즐기는 게 필수 루틴이다. 작년에는 K의 청첩장 모임을 핑계로 그 중 한 곳을 찾아 넷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삼겹살을 먹었다.
아지트 같던 공간이 을지로나 성수동을 능가하는 핫플레이스가 된 건 2년 전쯤부터다. 유명 유튜버들이 하나 둘 다녀가고, 웹 매거진에서는 야장 맛집으로 소개되며 외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된 탓이다. 매일 같이 지나치던 삼겹살집은 어느덧 대기 명단에 이름을 적고 한참 기다려야 하는 ‘줄 서는 맛집’이 되었다. 청첩장을 받던 그 날에도 가려던 식당이 손님으로 꽉 차 그 맞은 편 가게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성북천의 아름다움이 드디어 널리 알려지는구나 싶어 뿌듯하면서도 왠지 아쉬운 이 오묘한 기분. 나만 알던 가수가 하루 아침에 슈퍼스타가 되었을 때 느끼는 팬의 기분이 대충 이러할까 싶다.
하루가 다르게 날이 따뜻해지면서 요새는 더 자주 성북천을 찾게 된다. 그것은 곧 '야장 시즌'이 돌아온다는 말이기도 하다. 머지 않아 인스타그램에는 또 다시 1년 전에 보았던 익숙한 맛집 추천 게시물이 돌아다닐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알고리즘이 성북천을 점령하기 전에 퇴근길의 속도를 높여 부지런히 가게에 발도장을 찍는 것.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 화면을 옆으로 넘기다가, 다시 돌아가 코치님의 스토리에 살포시 '공감'을 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