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에 심화반을 만들면 안 되는 이유는?
"내가 그동안 도대체 뭘 놓치고 있었던 걸까?"
두 번째 고3 담임을 맡게 된 고하늘샘의 독백입니다. 대학을 갈지, 가지 않을지 고민하던 학생에게 '사탐이냐 과탐이냐' 선택과목을 결정하라고 재촉하던 고하늘샘.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학생을 돌려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그 학생이 놓고 간 자퇴원이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3등급 이하의 평범한 학생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요. 명문대에 진학해서 학교의 명예를 높여주는 특별함은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교사의 관심과 지원이 더욱 필요한 보통의 학생들을 소홀하게 대했던 자책감이었습니다. 학급 명렬표에는 같은 크기로 모든 아이들이 사진이 있지만, 몇 명의 얼굴만 더 크게 더 또렷하게 보였던 것이지요.
학교의 문화가 상위권 학생들의 진학 실적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니, 신규샘도 1, 2등급 아이들에게 시선이 꽂혀버리게 된 것이라 더 안타깝습니다. 고하늘샘이 심화반 '이카로스'를 담당했던 것도 성적 하위권 아이들을 소홀하게 대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요. 서울대 의대에 1명을 보냈지만, 3등급 이하의 아이들의 진학 결과가 참담한데도, 대치고는 심화반 인원을 더 늘려서 특별 관리를 하려고 합니다. 대상을 1등급에서 2등급까지 확대한 것인데, 당연히 다른 아이들이 '학교가 우리를 버린 것'이라고 반발하며 이카로스 모집 포스터를 찢고 자습실에 들어가 책상마다 우유팩을 던집니다.
결국 명문대라는 태양에 가까이 가기 위해 '심화반'이라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 이카로스였지만, 덕지덕지 붙여놓은 밀랍이 명문대에 많이 보내려는 과욕 때문에 결국 녹아내려 추락하게 된 것입니다. 일상적인 수업과 체험학습, 학생회와 동아리 활동의 수준을 높이고 학생들이 주도하게 한다면 심화반을 따로 만는 것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요.
<블랙독> 14화를 보며 처음 고3 담임을 하던 때의 기억이 소환되었어요. 그 후로 고3 담임을 내리 4년 했지요. 졸업식 며칠 전에 진학통계를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는데, 이름 옆에 '비진학'이라고 적어냈던 아이들 몇 명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대학을 가지 않았든 가지 못했든 '비진학' 세 글자로 간단하게 적어내기엔 그 아이들의 고민이 참 많았을 것 같아요. 쌓아둔 성적이나 스펙도 없고 목표나 꿈도 희미하던 아이들에게 마지막 고등학교 1년은 지옥 같았을 것이고, 담임이었던 저는 지옥문을 지키고 서있는 염라대왕 같은 존재였겠지요. 예체능 학원에 가는 것이 아니면 강제로 야자를 했던 시절이라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것이 답답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있으니 한 달에 1번 이상은 상담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들을 옆에 앉혀놓고 녹음기처럼 얘기하던 순간이 많았네요. "왜 꿈이 없니?, 지금이라도 노력하면 성적이 오를 거야, 전문대라도 가야지 취직을 하지. 고졸이면 사람 취급 못 받는 세상인 거 몰라?"와 같은....
다행히 저는 좋은 선배교사를 많이 만났습니다. 어떻게든 숨어있는 적성과 관심을 찾아내서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고 원서를 써서 합격시켜주던 옆자리 선생님의 상담을 엿듣고, 담임반 아이들을 불러내서 비슷하게 따라 했지요. "너는 원래 요리에 관심이 많았어. 떠올려봐. 너의 어린 시절을. 레드썬!" 뭐 이런 식이었어요.^^; 처음에야 속이 터졌지만, 자주 만나서 길게 얘기하다 보니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성장과정이 이해되고 현재의 고민도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 말문을 열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보여주지 않았던 몇몇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책임질 것도 아닌데 어디든 합격시키려고 아이들의 등을 떠민 것은 아닌지... 또 부모님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걸 핑계로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아이의 말만 듣고, 너무 쉽게 상담을 멈춰버린 것은 아닌지... '비진학' 세 글자에 담긴 인생의 큰 고민들을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학창시절 마지막 담임인 '고3 담임'의 존재가 무거운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을 다시 하게 해준 블랙독의 작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