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작가에게 전해 들은 막스 베버의 말입니다. 최근 라디오에서 정치 평론인 듯 정치 평론이 아닌 평론을 들었는데,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는 교육'에 관한 고민에 도움이 많이 되었어요.
유시민 작가는 인간이 불완전하고 추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정치를 하다 보면 논리적으로 옳지 않아도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고, 더 큰 중요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소한 양보를 하고 눈을 감아줘야 할 때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혐오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정치가 필요한 것처럼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는 교육'도 필요할 텐데, 참여소통교육모임의 <혐오의 시대, 공존의 교실> 연수에서 엄기호 교수님께 혐오의 반대말을 찾기 위한 빛줄기를 발견해서 다행이었어요. 아래에 간단하게 공유해 봅니다.
첫 번째는 '연민'입니다. 혐오는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 열등한 존재에 대한 경멸이 지나치게 될 경우에 생기게 되는데, 동류의식도 당연히 없고 그들의 딱한 처지를 목격해도 불쌍한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연민이 생겨나면 혐오하는 자신도 혐오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생겨나는 교육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 생각에는 혐오하는 대상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하면서, 그들이 받은 차별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분노라는 기름으로 타오를 때 연민은 더욱 진실한 감정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를 위해서는 혐오하는 대상을 나의 바깥이 아니라, '나의 안'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반대말은 '지성'입니다. 하찮고, 더럽고, 때로는 위험한 그들 역시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지성주의'와의 투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근대의 지성주의는 '나의 바깥'에 대한 관심과 이해에 기반한 열린 태도를 기반으로 탄생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반지성주의는 '나의 안'의 사람들만 같은 부족으로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지식이나 신념을 절대화합니다. 사회에 큰 문제가 발생할 때 '우리끼리 있을 때는 문제가 없었다'라고 선동하면서, 다른 존재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고립시키거나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단순 논리와 선동에 아이들이 넘어가게 하지 않으려면, 학교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반박 가능성을 존중하는 태도와 반대 주장에 대한 열린 자세를 길러주어야 합니다. 물론 교사들이 다 짊어갈 수 없는 어려운 과제이긴 하지요. 그래서 마지막 반대말을 제안하고 싶어요.
세 번째 반대말은 '희망'입니다. 엄기호 교수님도 강의 마지막에 '인간 혐오의 유혹'으로 벗어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인간이 가망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인간이 가망 없다고 믿는 사람을 보면서, 정말 인간이 가망 없다고 믿게 되는 것으로 벗어나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여, 우리를 혐오로부터 구원하소서"라는 농담(?)도 하셨어요.
2014년 여름, 광화문에서 단식농성을 하던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벌인 일베 회원을 떠올리면 '혐오의 유혹'이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사, 아니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들이라면 혐오스러운 인간을 보더라도 그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만든 조건, 상황, 세력을 '지성주의'로 밝혀내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같은 인간으로 여기면서 '연민'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매우 힘든 일임을 알기에 혐오 문화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막스 베버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불완전함과 추함을 가지고 있는 '같은 인간'이라는 감각을 잃지 않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어떤 인간이라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면 '연민'이 통할 수 있고, '지성'으로 대화할 수 있다고 믿으며, 아유와 냉소와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실천하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천천히 진보해왔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