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이 <징비록>에서 묘사한 이순신의 모습입니다. '뛰어나게 지혜롭고 총명하다'라는 뜻의 '영명(英明)한 이순신'을 영화 <한산>에서 생생하게 만났습니다. <한산>에서 이순신은 답답한 정도로 진중한 언행과 신중한 판단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적 재미는 <명량>에 미치지 못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장군의 맑고 깊은 눈빛이 계속 떠올라서 신기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결같은 눈빛과 목소리, 꼿꼿한 자세는 바로 '평정심'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듯했어요. 작전 회의에서 부하 장수들의 논쟁을 듣고만 있고, 원균의 비겁한 모습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몰려오는 왜적의 함대를 향해서도, 온 전력을 퍼붓는 결정적 순간을 위해 기다리고 기다려서 평온하게 (정말 국어책 읽듯이) "발포하라~" 한 마디뿐이었지요.
이러한 평정심이 있었기에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32살, 뒤늦게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20대를 보냈을 것이고, 관직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상관의 부당한 인사 청탁을 거절하고 나서도 차분했을 것입니다. 그를 좋게 본 병조판서가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겠다는 제안도, 그의 화살통을 선물해달라는 또 다른 병조판서의 부탁도 평온하게 거절했을 것입니다. 높은 사람 앞에서 '형님~'하면서 아부를 떨고, 부하들을 앉혀놓고 '우리가 남이가. 한잔해. 동생~'하면서 대장 노릇도 하지 않았겠지요.
이처럼 무서운(?) 평정심은 무장이 되기 전에 '강직한 선비'의 인품을 먼저 갖췄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MBTI에 관해 검색해 보면,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I' 내향적 성향이라는 견해는 일치합니다. 현실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인 'N' 성향이라는 의견도 많네요. (여기까지는 저의 MBTI와 일치해서, 여러 가지 일로 바쁘고 고민이 많은 지금, 괜히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 것 같아요.^^;)
영화 <한산>에서 만난 이순신 장군은 차분한 말과 행동으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파격적인 도전을 평온하게 준비하는 분이었습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고뇌하고, 후회하고, 다시 결심하고 그랬겠지요. 그런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난중일기>를 썼을 것이고요. 사실을 간단하게 적은 문장이 대부분이지만, 바둑의 복기처럼 수많은 성찰의 시간의 지나갔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이순신 장군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평상시에서도 전쟁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습니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다른 장수들, 심지어는 임금님도 평정심을 잃고 도주할 때 이순신 장군만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중심을 잃지 않았고, 무너져버린 군사와 백성을 추스르고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준비하는 마음을 항상 지니고 평상시를 대비하듯, 한산 대첩을 앞두고 학익진에 배치할 배 한 척 한 척을 신중하게 적어가듯, 그 분의 그림자라도 닮고 싶은 심정으로 제가 할 일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