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수샘의 장이불재 Mar 14. 2023

<더 글로리> 시즌2, '내가 연진이의 담임이었다면?

- 학교 폭력을 예방을 위한 '학급 쪽지상담' 양식 공유

  2004년 겨울 고2, 18살 연진이는 전학 간 소희를 길거리에서 마주칩니다. 소희가 자기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자, 요즘 아이들 말로 '빡쳐서' 소희를 폐건물 옥상을 불려내어 사건을 일으키게 되지요. 자기가 괴롭히던 소희가, 아무리 짝퉁이라도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연진이의 눈에는 소희가 '하류 인간'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재준이와 사라는 자신과 같은 급이고 명오와 혜정이는 그 아래 급이라 편하게 이용하면 되지만, 소희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기분이 더러운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괴롭혔고, 소희가 전학을 가자 동은이를 다시 선택합니다.

  그런 연진이인데, 소희가 이런 말을 하자 더 빡치게 되지요.


윤소희 : 난 이제 너 안 무서워. 너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박연진 : 하핫. 뭐래니? 반올림 찍냐?

윤소희 : 니 돈이 무서웠던 거야. 생각해 보면 너도 참 불쌍해. 그래서 내가 너 용서해 줄 거야. 나는 너보다 나은 사람이니까.

박연진 : 와, 나 졸지에 불쌍한데 너보다 못하기까지 한 년이 됐네.


  같은 인간 족속이 아닌 소희가 자기를 불쌍하다고 하니까, 거짓말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가 울고 떼를 쓰는 것처럼 연진이도 폭주를 시작합니다.


  "그럼, 불쌍한 년이 보풀 좀 정리해 줘도 될까? 나보다 낫다며, 너. 그럼 TPO는 갖춰야지."




  검색해 보니 TPO는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맞게 의복을 알맞게 착용하는 것을 뜻하네요. (처음엔 TPO가 커피 브랜드인 줄 알고, 소희에게 커피라도 마시고 정신 차리라고 하는 줄 알았지요. ㅠ.ㅠ )

 연진이에게 TPO는 자신과 소희를 다른 신분으로 나누는 기준 중에 하나라서, 'TPO도 모르면서 니가 감히 나보다 낫다고 해'라는 심리가 튀어나온 반응인 것 같습니다.

  돈은 많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연진이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아이입니다. 엄마가 부정한 방법을 큰 돈을 모은 것을 알고 있으니 더욱 그렇지요. 그런 연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 중에 하나가 TPO인데, 그런 개념도 모르는 소희 같은 아이들은 경멸의 대상이고, 지켜줄 든든한 보호자도 없으니 안전한 장난감이 된 것이지요. 담임 선생님도 소희, 동은이 같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니, 눈치 볼 것도 없습니다.


  2004년에 저는 고등학교에서 담임 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직 3년차라서 혈기왕성했고, 주위에 입시 학원이 없는 농어촌 학교라서 무슨 객기 같은 책임감으로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대학에 보내려고 몰아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 제가 만든 쪽지 상담을 보면, '담임 교사와 학생 한 명'만 존재할 뿐, 다른 친구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있습니다.

  담임이 관심이 없으니, 학생들도 다른 친구들에게 큰 관심이 없고 같은 반인데 이름을 모르기도 합니다. 같은 계급하고만 끼리끼리 놀다가, 담임 모르게 약한 아이에게 심한 장난도 치고, 괴롭히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2011년부터 혁신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쪽지 상담 양식이 달라졌습니다. 후배 교사에게 상담지 양식을 달라고 졸라서 받기도 했고, 때가 되면 좋은 양식을 공유해 주는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시기에 맞게 질문 내용이 다른 설문지를 지필고사 끝난 다음에 받아 활용했어요. 조회, 점심시간, 종례 후에 한두 명씩 교무실에 불러서 상담지에 적은 내용을 보며 5~10분 정도 대화를 나눴지요.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생과 학생의 '평등한 만남과 행복한 대화'가 있는 학급이라면 따뜻한 햇살이 교실 구석구석을 비출 것이고, 학교 폭력이라는 독버섯이 자라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 혹시 제가 모르고 지나쳤을 학교 폭력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습니다. 다시 담임을 맡는다면, 아직 어린 아이들의 선한 마음을 믿고, '지금 힘든 일이 있는지? 옆에 친구가 힘들지는 않는지' 더 자주 물어보고 싶습니다.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은 학교 밖에 있지만,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지난 학교 문서에서 검색한 '학급 쪽지 상담' 양식을 공유합니다. 제가 만든 것도 있고, 같은 학교 선생님이 보내준 것도 있습니다. 2004년의 저처럼 성적 상담, 진로진학 상담만 하지 마시고, '학급에서 어려움을 겪는 친구를 어떻게 도울까' 먼저 물어보는 선생님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때론 학급 단합대회로 서로 친하지 않은 아이들을 섞어 모둠에서 떡볶이도 만들어 먹고, 미니 체육대회도 했으면 좋겠어요. 2023년의 소희와 동은이, 그리고 불쌍한 연진이를 위해서요...



작가의 이전글 드라마 <일타 스캔들>, 일타 강사의 충고에 답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