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4세가 된 가왕 조용필의 20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인 '그래도 돼'의 뮤직 비디오가 유튜브에 떴다. 그의 영상을 특별히 찾아본 적이 없는데, 알고리즘이 꼬시는 이유가 궁금해서 노래를 듣고 댓글을 읽었다. 읽다 보니 댓글 하나가 나를 감전시켰다. '좋은 곡엔 칭찬이 달리지만 명곡은 저마다의 사연이 달린다.'
그랬다. 확실히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은 댓글이 많았다. 문득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고 하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달린 댓글도 궁금했다. 칭찬이 많을까, 사연이 많을까?
최근 댓글에는 노벨 문학상 수상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 칭찬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주인공의 바로 옆에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표현이 잘 되었으며, 남자로서 다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 많아 부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라는 댓글이 눈에 띄었다.
수상 이전의 댓글에는 자신의 사연을 전하는 글이 꽤 있었다. '가족이라는 집단을 구성하는 우리들은 얼마나 서로를 알고 있을까?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들은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는 집단일까? …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던 두 자매를 계속 부여잡으면서 작품을 다시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게 한 소설이다.'
노벨 문학상을 한강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한 심사위원들도 비슷한 느낌을 공유하지 않았을까? 평범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작품을 읽으며 소설 속 인물과 함께 견디고 슬퍼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누구와 닮았는가?' 하고.
<채식주의자>에서 우리는 영혜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에 직면한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주위 사람도 만난다. 나 역시 영혜의 남편, 형부, 아버지의 시선으로 빨려 들어가서 과거의 내 모습 속을 어지럽게 유영하다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내가 학창 시절 당했던 폭력과, 교사가 가진 알량한 권력으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를 말과 행동도 하이라이트 영상처럼 지나갔다.
<채식주의자>가 이토록 독자들에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도록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영혜와 주변 인물의 삶이 세 편의 연작 소설로 묶여 하나의 단단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은 나무의 뿌리, 몸통, 가지처럼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 작품은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은 존재이고, 엔지니어가 제품을 분해하듯 해체할 수 없다.
그런데 나무의 몸통 껍질에 있는 무늬가 이상하다고, 선정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아있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차근차근 말해주면 좋겠다. 고개 들어 줄기의 잎과 꽃도 보고, 땅 밑의 뿌리와 미래에 생겨날 열매도 상상해 보라고 말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한강의 소설을 펼치는 독자는 <아침마당>이나 <인간극장>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잘 풀어가는 소설가야 많겠지만, 한강은 <그것이 알고 싶다> 혹은 <서프라이즈>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극단적이지만 아름다운 문학적 상상력으로 세밀하게 형상화하는 힘이 있다. 세상의 잔혹한 폭력에 맞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한강의 소설. 다음 소설이 제발 <인간극장> 같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