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에 첫눈이 내리면...
평양에도 치맥을 하다 첫눈이 오면 어깨를 기대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연인들이 있겠지요. <사랑의 불시착>이 일깨워준 평범한 진실이었습니다. 바싹 구운 통닭에 대동강 맥주를 마시지만, 한강변에서 흔히 만나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전에 본 <샘 해밍턴의 페이스北>에도 순박하고 웃음 많은 북한의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나오는데요. 이들도 우리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분들이 우라나라에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상식을 지금도 흔들고 있는 것이 분단 70년이 만들어낸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분노입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어떤 대상에 대해 무조건적인 적개심을 부추기는 세력은 일단 의심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속에 품은 생각을 하나씩 벗겨보면, 자신들의 배타적인 이익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잘 묘사하고 있듯이, 남북 모두 특권층이 존재하고 그들의 부와 권력은 1000년을 산다 해도 다 못 쓰고 갈 정도입니다. 반면에 남에는 생활고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가족들의 뉴스가 사라지지 않고, 북에는 거리를 떠돌며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책임을 따지는데 열을 올리면서 정작 분단이 만들어낸 삐뚤어진 사회경제 체제 때문에 생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은 모두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지요.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에 태어난 죄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삶의 존엄이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 온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다음 침공은 어디?>에 보면 2011년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배관공인 아버지의 인터뷰가 나옵니다. 어느 섬에서 열린 여름캠프에서 77명이 네오나치 인종주의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으로, 희생자 중 34명은 14~17세, 22명은 18~20세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인범을 죽이고 싶지 않다, 그와 같은 선상에 서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이 끔찍한 테러 이후에도 노르웨이의 정부나 국민들 모두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와 복수심을 부추기지 않았다고 차분하게 말하는 태도가 충격적이었어요.
"노르웨이에서는 수상이나 국왕을 비롯한 모든 기관과 모든 공무원과 언론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지금까지 서로를 보살폈듯이 이제는 이 나라를 보살피자고요. 그렇게 하나가 돼서 우리 사회가 마음을 열면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가 더 풍요로워지겠지요. 문을 걸어 잠그는 건 도움이 안 돼요. 증오만 키울 뿐이지요."
사형제도가 없는 노르웨이에서 테러범 브레이비크는 최고 21형을 받고 복역 중입니다. 증오를 부추기지 않고, 국가의 큰 시련과 고통도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만들어 가는 계기로 삼는 노르웨이가 정상일까요, 아니면 2001년 9.11 테러로 이슬람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전쟁을 일으킨 미국이 정상일까요? 미국은 거의 80%의 죄수가 5년 안에 재수감되지만,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20% 정도라고 하네요.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가장 최악의 인간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면, 어벤저스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세계평화도 저절로 이루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도 물어볼 수 없는, 우주만큼 먼 나라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지구에서 가장 슬픈 일도 사라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