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에서 자취방 구하러 다닌 이야기
1월 한 달은 이사할 방을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 나는 스무 살 때 계약한 원룸에서 8년을 살았다. 겨울에 외풍이 심하고 방음이 안 되는 것 빼고는(적고 보니 두 개 다 치명적인 것 같긴 하지만) 사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다. 이사를 결심한 이유는 그냥,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였다. 한 달에 50씩 빠지는 월세를 좀 줄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계약금을 올리더라도 월세를 덜 내는 쪽으로 말이다.
집을 구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네였다. 1. 산이 가까운데 2. 도심이 멀지 않은 3. 성북동 4. 성북동 5. 성북동. 나는 오직 성북동을 원했다. 내게는 '성북동'의 로망이 있었다. 예로부터 문인들과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모여 살았다는 터가 좋은 동네. 지금은 외교관들의 고급 주택이 모여있는 동네. 한 마디로 '비싼 동네'다. 그 동네에 살면 왠지 나도 지적으로 충만해질 것 같은... 예술적 영감이 차오를 것 같은... 그냥 그런 근거 없는 기대가 있었다. 발품을 팔면 가진 돈으로 어떻게 비벼볼 수 있는 집이 있지 않을까. 나는 정말 아무 물정도 모르고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첫 번째 부동산에서는 반지하 방, 그리고 주택을 개조한 원룸텔의 2층 방을 보여줬다. 반지하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인테리어를 그럴듯하게 해 놔서 솔직히 혹했다. 물론 월세를 듣고 마음을 싹 접긴 했다. 반지하 1.5룸에 60만 원을 내고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주택의 2층 방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방도 적당히 널널했고 무엇보다 세간살이를 보관할 수 있는 다락방이 따로 있었다. 한 집에 8년 살다 보면 살림이 적잖이 불어나기 마련이라 내게는 정말 반가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 방을 계약하지는 않았다. 나는 평소 씀씀이가 헤픈 편이라 큰돈을 쓸 일이 있을 때는 주위 친구들에게 조언을 얻곤 한다. 2층 방의 간략한 스펙과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냈다.
"야 이 집 어떠냐."
주택에 2n년 차 살고 있는 친구로부터 주택 감정(?)을 받았다. 오래된 주택은 외풍이 심하고 볕까지 안 든다면 퀴퀴한 냄새가 빠지지 않을 거란다. 이 집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 선생'이다. 다락방은 관리를 하지 않는 순간부터 바 선생과 꼽등이의 안식처가 된단다. 월세 한 푼 보태지 않는 혐오 생명체와 주거지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이 방을 포기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부동산에서도 내가 살만한 곳을 보여주진 못했다. 멀쩡하다 싶으면 벽지 아래 곰팡이나, 수압이 약한 수도꼭지가 거슬리는 방들 뿐이었다. 가진 돈이 많이 적은 것도 아니었는데 서울 괜찮은 동네에서 이 정도는 어림도 없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네이버 부동산에 접속했다. 지금까지는 부동산 어플에 나온 매물만 봐왔는데 네이버에도 적당한 방이 없으면 과감히 이사를 포기할 예정이었다.
'투룸, 월세 35.'
하늘이 돕는다고 생각했다. 반전세 매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가진 자금으로 충분히 계약할 수 있는 집이었다. 앞뒤 생각 않고 부동산에 먼저 연락을 했다. 당장 집을 보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 집의 구체적인 사양이 보였다. 완공 1971년. 내년이면 반백살이 되는 아파트다. 성북동에서도 한참을 올라가는 끝자락에 위치한 오래된 아파트였다. 허물어진 외벽, 정리되지 않은 건물 주변이 신경 쓰였지만 사실 나는 이 집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원래 목표하던 대로 월세를 낮출 수 있었고, 보증금도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 무너질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1971년은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이 있었던 해의 바로 다음 해다. 대형 사고가 있은 뒤에는 더 많은 규칙이 생겨나고 적용된다. 1971년에 완공된 건물이라면 어느 때보다 엄격한 기준에 맞춰 건축되었을 것이다. 이 집은 안전하다. 나는 확신을 했다.
보통 매물 근처에 부동산이 있기 마련인데 이 집을 내놓은 중개인은 연희동에 사무실이 있었다. 그는 벤츠를 타고 30분을 달려 성북동엘 왔다. 가파른 오르막을 단숨에 올라가 그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 옆으로 길게 부엌이 있고 현관문 맞은편에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전형적인 오래된 집의 구조였다. 햇빛은 잘 드는데 사진으로 본 것보다 조금 더 낡았고, 날이 풀려 따뜻했던 그날의 기온과 어울리지 않게 약간의 한기가 돌았다. 중개인은 '이 정도면 진짜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도 내심 동의하고 있었다. 신경 쓰이는 것들은 어차피 집 안에선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집이었다.
그때 나는 '무조건 이 집을 계약해야겠다'는 생각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지금 사진을 다시 보면 허술한 수도관이나 부실한 타일, 어설프게 발라진 벽지 하나하나가 다 보이는데, 그때는 그 집의 모든 것이 유서 깊고 고즈넉한 성북동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결국 내가 성북동에 살게 되는구나' 뿌듯해하며 현관문을 향하는 순간, 어떤 물체 하나가 눈에 걸렸다. 현관문 바로 위의 벽. 그곳에 새하얀 편지 봉투 하나가 붙어있었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벽지에 혼자 새하얗게 붙어있는 그것 하나로 방금까지 사랑스러웠던 공간에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저씨 저건 뭔가요...?"
"부적이지 부적. 보통 오래된 집에 이런 거 붙여놓잖아."
손가락으로 봉투를 찔러보다가 부적이란 말에 황급히 손을 뗐다. 일반 종이 부적은 아니고 나뭇가지 같은 것을 말려서 넣은 것 같았다. 바스락거리는 촉감과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제야 나는 그 집이 제대로 보였다. 입구에서 훅 밀려오던 한기.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 벽에도 남아있는 습기의 흔적. 다른 날보다 따뜻했던 날, 볕이 이토록 잘 드는 시간에도 이 집이 서늘한 이유가 저 봉투 안에 있는 건 아닐까.
그 부적이 복이 들어오라고 붙어있는 거였는지, 아니면 나쁜 것을 쫓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쩌면 내가 괜히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잡귀를 쫓기 위해 식물이나 동물 뼈 같은 것을 말려 부적처럼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나도 '입춘대길'류의 부적은 본 적이 있다. 좋은 걸 불러오기 위한 부적이었다면 저렇게 은밀하게 숨겨 놓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실제로 거기에 뭐가 있든 없든 그런 찝찝한 기분으로 그곳에 살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본 그 집은 팔렸는지 어쨌는지 더 이상 네이버에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같은 건물의 다른 집이 매물로 나와있다. 재건축 예정이 없는데도 2억 가까운 금액이다. 반백년 연식에도 저 정도 가격이면, 정말 괜찮은 집이었지 않을까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월세를 아끼는 대신 다른 것을 내줘야 했을지도 모른다. 내 운이라던가 좋은 꿈자리라던가 건강이라던가 하는 것 말이다. '싼 데는 이유가 있다'. 내가 조금만 부지런하면 극복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부동산 투어에서는 이 말을 뼈저리게 실감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성북동을 포기했다. 사실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고, 언젠가 여유가 되면 다시 그곳에 살만한 집을 찾으러 갈 생각이다. 건물 하나 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자금을 가지고 더 이상 궁색하지 않아도 될 때쯤 말이다. 지금 가진 돈으로 저 좋은 동네에 살려면 바퀴벌레나 귀신 중 하나(혹은 둘 다)는 데리고 살아야 한다. 내가 아무리 성북동이 고파도 월세 한 푼 보태지 않는 저세계 혐오 생명체와 동거할 만큼 급하지는 않다. 대신 성북동만큼이나 좋은 동네에 방을 얻었다. 이전 집보다 월세가 적다. 주위에 초등학교가 있어 안전하고, 방은 넉넉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넓다. 집주인 할머니는 수다스럽지만 굉장히 친절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수준이 아니라 넘치는 기분이다. 이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