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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괴왕 Jul 01. 2019

칼날 위의 하루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나는 며칠 째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한 적이 없다.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어디가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특히 가족들한테 말할 수가 없다. 실은 요즘 착한 딸로서 살아온 지난날이 좀 부담스럽다. 당분간은 주변 사람들이 내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토요일엔 과식을 했다. 먹는 동안은 머리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아침부터 꾸역꾸역 뭔갈 계속 먹었다. 일요일은 새벽부터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체기가 가시지 않아서 늦게까지 잠을 못잤다. 잠이 오는데 잘 수가 없었다. 아침에 늦게 눈을 뜰까봐 무서웠다.


첫 인사도 나누기 전에 업무를 받았다. 현장에 나갔다. 현장에서는 '니가 처음인데 나보고 어쩌라고?'하는 눈빛을 받았다. 얼른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능숙하지 못해서 멍청한 행동만 몇 번을 반복했다.


카페에서 보고서를 쓰다가 급하게 지시가 내려와서 다시 일을 보러 나갔다. 커피를 시켜놓고 두 입 정도만 급하게 들이켰다. 그렇게 맛있는 커피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비스로 받은 초콜릿을 못 먹은 건 좀 아쉬웠다. 길에서 보고를 하고 한참동안 현장에 머물렀다. 카톡 숫자 1이 지워지지 않아서 불안했고 1이 없어지고도 한참 대답이 없어서 또 불안했다. 그동안 뭘 해야할지 모르는 내가 한심했다. 친구들을 붙잡고 무섭다고 계속 칭얼댔다. 그러지 않았으면 곧바로 집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친구들은 나를 열심히 격려해줬다. 너무 미안하고 정말 고마웠다.


우선 식사를 하라고 하셨다.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스타벅스에 가서 딸기요거트프라푸치노를 먹었다. 밥을 느긋하게 먹으면 안될 것 같아서 끼니가 될만한 걸로 시켰는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매장이 추운데다 어제 체기가 아직 남아있어서 오후 내내 배가 살살 아팠다. 그렇지만 식사를 잘 끝냈다고 거짓말을 했다. 


처음 인사를 드렸다. 대화하는 내내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난 이미 글렀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뭐 그런 생각만 했다. 실은 다정한 분이었다. 여느 때처럼 내가 괜히 작아지고 주눅들고 그랬던 것 뿐이다. 아무도 뭐라그러지 않는데 내가 나를 매질하느라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적어 보내라고 하셨다. 업무를 마치고 저녁 늦게야 1천 자를 써서 보냈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다(사실 늦은 건 아니지만). 아주 짧은, 단답의, 자음, 두 개가, 왔다. 이게 별 의미가 아닌 걸 안다. 그냥 '확인했다'는 말을 간략하게 표현한, 별 의미 없는 대답이란 걸 안다. 머리는 안다. 근데 나는 일상 생활에서 그정도의 단답을 받을 일이 별로 없다. 친구들끼리라도 이모티콘을 쓴다거나 시덥잖은 말 하나를 덧붙이는게 습관이 돼서 그런 대답이 좀 낯설었을 뿐이다. 사실은 철렁했다. 지금도 두근두근한다. 내가 뭔가 실수한 건 아닐까, 너무 늦게 보내서 심기가 불편하신 건가, 내일 한 소리 듣지는 않을까? 안 그럴 거 안다. 아는데 그냥 마음이 그렇다.


맨발로 칼날 위에 서는 건 굉장한 묘기다. 내가 지금 그런 묘기를 부리는 것 같다. 분명 뭔가 대단한 걸 해낸 것 같은데 여기서 조금만 삐끗하면 내가 아주 크게 다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걸 잘 해내는 것도 무섭다. 다음엔 바늘 위에 서는 걸 꿈꾸게 되지 않을까. 그럼 나는 대체 뭘 해야 마음이 편한거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즐겁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불안하고 쫓기는 기분이 든다. 칼날 위에 오르기 전에도 그랬고 칼날을 오르고도 그렇다. 나는 왜 나에 대한 기대를 놓은 척 놓지 못하고 있을까. 언제쯤 나는 내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초연해질 수 있을까. 


내일이 아주 조금만 기대되고 아주 많이 무섭다. 이것 말고도 해야할 일이 많은데 자꾸 뭔가를 그르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앉아서 게임만 하고 싶다. 그렇지만 오늘 꼭 해야할 일이 있다. 오늘 정말 여러 번 울고 싶었는데 지금은 울음이 명치로 삼켜지는 느낌이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아서 잠을 못잔다. 내일은 잠을 푹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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