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솔 Apr 05. 2018

" 실감 "

천천히 그리고 깊숙하게

서서히 몸에 와닿는다.

나는 너무나 감정적이어서 사진 한 장에, 음악 한 소절에, 그림 한 점에 무너지고 만다. 때론 그게 내 인생에 큰 장점 같았고 나의 예술적 생의 기반이 되고 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설명하기에 내 생은 생각보다 불행하고, 훨씬 복잡한 삶의 연속이었다. 나의 감정은 삶의 오차 범위를 늘리고, 이성적인 사고들을 때려잡고, 더욱이 나를 슬프게, 또 우울하게 바닥까지 끌어당길 뿐이었다. 한 번 하고 후회할 짓 들을 수없이 반복하고, 상처받고 스스로 생체기를 내고 허망하게 아픔에 대해 토해내고 다시 손이 닳도록 주워 담고 반복되었다. 그런 내게도 때론 한 줄기 빛이 있으리라 하고 생각했고, 실제로 거의 그 빛에 손이 닿았을 즈음에 나는 두려움에 앞서 손을 숨겨 스스로 불행의 길을 택하곤 했다. 이제 실감이 난다. 선택의 후회들과 타인에 대한 경멸로 인한 관계의 종말을. 


나는 때론 법정에 서있는 피해자가 되었다가 가해자의 위치에서 피해자를 비난한다. 누구도 나를 변호해주지 않고 그 누구도 나의 죄에 대해 묻지 않는다. 역할극처럼 나는 역에 몰입해서 주어진 역을 성실히 수행해 나갈 뿐이다. 나는 그런 뻔뻔하고 이기적인 삶 사이에 살고 있다. 스스로 비난 섞인 웃음으로 답하지만 나조차도 내가 정말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아, 사람 관계는 아무리 지나도 어렵다. 내가 성숙해졌구나 생각되었을 즈음에 왜 나의 가치관을 외면할 만큼 큰 사건이 터지는 걸까. 나조차도 내가 어렵다고 느끼지만 이 사회 속의 사람들은 더욱이 어렵고 이해할 수 없다.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범위가 넓어진다. 이 모든 게 어색하고 낯설게만 느껴진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쥐고 살아야 할 운명이었나 보다 함부로 거스르다 보니 이토록 끝까지 오게 된 게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고 동시에 위로한다. 물론 처음은 아니다. 누군가 이토록 밉다거나, 정말 증오스럽다는 감정이. 그렇지만 자주 있었던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늘 이런 것들에 서툴다. 붓을 자주 쥐어보지 못한 화백처럼,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사람은 너무 어렵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너무 함부로 혐오하면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너무 급박하게 변하면서, 사회가 지나치게 냉혈 해지면서 우리는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에 공감하기 어려워지고, 감정적인 부분이 많이 죽어버린 게 아닐까. 이제 그런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면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생각은 개인을 죽이고, 커져서 사회의 영역을 지워버린다. 사회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들이 이제 혐오의 일종처럼 느껴지던데, 내가 느끼는 혐오의 영역은 조금 다르다. 나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언급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각자 개개인의 삶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함부로 떠들었다가 피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나는 그저 안타까움에 혀를 차고 마음 아파할 뿐이다. 타인의 슬픔을 너무 기만하지 않았으면, 타인의 아픔을 너무 외면하지 않았으면.


약해졌다는 게 실감이 난다. 심적인 것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이 너무 약해졌다.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하나 모든 것들이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몸이나 입을 빌려 누군가 나를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너무 약해졌다. 밤이 되면 늘 찾는다, 홀로 마실 맥주 몇 캔과 빨아들일 수 있는 우울한 베이스의 음악들. 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야 할 날과 아무렇지 않게 대해야 할 사람들이 어렵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여럿 했지만, 생과 사 사이에 저울질이 의미가 없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약으로 도배되었었던 나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탓은 왜일까, 항우울제라던가 수면제가 없으면 잠 못 이루던 나날들과 병원 복도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주저앉아 있었던 날들이 왜 생각이 나는 걸까. 지금 내가 원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나의 아픔이나 슬픔조차 똑바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걸까. 누가 들어주길 원하는 걸까. 내가 진짜 필요로 하는 것. 그게 뭔지 영문도 모르는 채 매일 밤을 아쉽게 어렵게 보낸다.


" 오, 알겠어. 이제야 인생이 뭔지 알겠어. 내 마음속에 있는 어둠은 영원히...나 혼자만 알 수 있는거야,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걸..그 동안 누군가 알아주길 바랬던 내 마음을 이제 어쩌면 좋지? " - 네이버 웹툰 <검은선>中


아직도 나를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는 그리움의 감정이 아닐까. 수없이 나의 영역을 침범하면서도 태연하게 감수해야 할 상처라고 나의 목을 부드럽게 조른다. 스스로를 해치는 길이라고 각인시켜 놓고도 막상 부드러운 손과 끝의 손톱이 내 목 깊숙이 혈관을 찌르는 대에도 나는 차마 밀어내지 못한다. 나는 이 수없는 짓을 반복하고 끝내 멍청이가 되어 아프다는 것에 익숙해진다. 열지 말아야 할 것들에 감히 손을 대어 세상에 저주를 뿌린 판도라처럼, 나 또한 호기심과 그리움으로 자꾸만 지독한 죄를 범한다. 그리워한다는 것이 이토록 아픈 것이었다면 그토록 짧은 시간에 사람을 안지 않았을 텐데 수없이 후회하고 참회하며 눈물을 흘려도 잔인하도록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 지겹다는 타인에게 끊임없이 나의 그리움을 이해해달라 호소해도 변치 않았고, 나를 변하게 하려던 타인이 우주가 어지러워질 만큼 나를 흔들어도 얼마 지나지 않은 나의 마음도 변치 않았다. 그리움은 향수가 되어 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그리움의 감정은 지나치게 무섭다. 이토록 속을 앓고 찢어가며 그리워하다가도 삽시간에 감정은 원망으로 변하기도 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나를 벼랑 끝으로 몰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을 죽도록 원망하게 되는 그런 과오를 범하게 된다. 내적으로, 때론 외적으로 저질러도 변하는 게 없음을 알면서도 원망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사그라들지 않는다. 인정할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은 나의 자존감을 짓밟고 스스로에 대한 비난은 짓밟힌 자존감을 좀먹고 커져간다. 원망은 그렇다. 그토록 가까이에서 모든 걸 내어줄 것 같은 그 사람에게 왜 모든 걸 가져갔냐고 탓하게 되는 것. 이 지나치고도 남은 나의 생에 왜 점을 찍어, 평생을 지워지지 않을 짐을 만들어 놓았냐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 허나, 지금의 어림잡기 어려운 감정으론 원망이란 단어도 낯설다. 아니, 대부분의 감정이 그랬다. 원망은 허탈로, 허무로 돌아갔다가 매개체를 통해 다시 나를 끄집어낸다. 이 수없이 지독한 감정의 반복은 스스로를 지치게 하고, 어두운 나락으로 끌어당겼다가 때가 되었다면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낮과 밤의 반복이고, 해와 달의 반복이 계속된다. 


우는 날이 줄었고 두통이 늘었다. 그렇게 아프다고 호소했건만 아프다는 게 여전히 실감 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 감정의 촉각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