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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Jul 14. 2018

" 끊기지 않은 전화 뒤에. "

귀를 기울여,

소심한 도둑질.


전화기 너머로 네가 '꺄르륵' 거렸다. 네 웃는 소리가, 화면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펜과 종이를 들어 너의 웃음소리를 차근히 기록했다. 너의 구분 없는 마디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가슴에 지나치게 쿵쿵 울려댔다. 비록 네가 멀리 있지만, 맞은편 창문 아래 돌담에서 네 웃음소리가 들렸고, 뒤 돌아 있는 주방에서 네 발소리가 들렸다. 쉼 없이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나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따금씩 휙 돌아보고 네가 없음을 상기하다가 몰래 엿들은 네 소리에 숨을 멈추고 입을 떼었다. 너는 의식도 못한 채 너의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그 소중한 일상 하나를 몰래 훔쳐 듣고 있었다.


아마 너는 모르고 있겠지. 내가 이렇게 엿듣고 있다는 것도, 이 순간이 내게 더없이 귀중하다는 것도, 이 순간마저 내게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나를 잊은 채 지나칠 만큼 평범한 일상을 듣고 있자니, 퍽 마음이 서운해졌다가도 괜찮다고 느껴진다. 후에, 네 웃음소리가 내 공간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날을 기다리며 나는 부푼 마음으로 기대를 걸어본다. 


그 아이가 나긋한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른다. 낮고도 명랑한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그 소릴 좇아 너를 따른다. 네 손길, 몸짓 없이도 온통 너에게로 향한다. 적당한 목소리로 나의 귀 언저리를 간지럽혀 때론 잊은 것들을 깨우곤 한다. 사랑이 어디 있었는지, 애정은 어디 있었는지, 모퉁이에 숨겨놓은 마음들을 따라 온통 입 밖으로 새어나가고 만다. 네 목소리 하나가 나의 우주를 몇 번 뒤집고도 남아, 나의 온 일생을 간지럽힌다. 필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네가 어디에 있더라도, 너를 놓치더라도 너의 목소리를 따라가면 되겠다, 안심했다. 


나는 피사의 사탑처럼 한없이 그녀에게로 기울어진다. 언제 쓰러질지, 한 치 앞의 운명도 가늠할 수 없지만. 나는 그녀에게로 점점 당겨진다. 이내 추락하고 부서질 운명이라 할 지라도 이미 기울어진 탓에 일으키는 법도 잊은 채 나는 이 생에 맨몸을 던진다. 세게 부딪혀 잊힐 운명이라 해도 나는 수없이 내던지고, 내던진다.


의식조차 잊은 채 즐기는 네 삶 속에서 나는 부록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지만, 내가 숨 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네게 존재를 알릴 수 있다면 나는 그 나름으로 행복하겠다. 내 생이 비록 네게 별 볼 일 없을지라도, 네가 함께 할 수 있는 만큼은 온통 진심이기에 그 마음을 보일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너에 대한 욕심이 늘어도, 나는 묵묵히 자리를 지켜 너를 기다리겠다. 나의 운명이 그러하다면 순간의 진심으로 만족하겠다.


네가 나를 잊고서 잠이 드는 순간에, 너의 새근새근 한 숨소리를 들은 적 있다. 너는 잠이 들었을 테지만 나는 한참을 붙잡고 너의 숨을 조곤히 들었다. 아무 말도 없는 너는 쉭쉭 숨을 내쉴 뿐이었지만 내겐 어떤 소리보다 너를 떠올리게 하는 고리가 되어주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너의 옆에서 너의 손을 꼭 잡고, 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의 삶 언저리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그런 고요한 밤이었다.


너의 뒤척이는 소리가 나를 어지럽혔다. 나도 잠이 들어야 할 지인데 네 소리 몇 번에 나도 따라 뒤척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 반복했다. 너는 이따금씩 거친 숨소리를 뱉었다. 깜짝 놀랐다가도 이내 웃어버리는 나의 밤은 조곤 하며 소란스럽다. 나는 너의 이름을 불러보고, 부끄러운 몇 마디를 뱉곤 한다. 너의 소리가 나레이션 처럼 내내 온통 나를 맴돌았다. 네 의도가 아니었지만, 너는 종일 나를 깨우고 흔들어놓는다. 너는 듣지 못하겠지만, 나의 짧은 밤 속에 너는 지나치게 두드러진다.


우습게도 너의 끊기지 않은 전화 속, 나를 잊은 생에서 나는 이 모든 장면을 떠올린다. 이 모든 문장을 기록해 나의 글로 너를 완성시킨다.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 속에서 너의 존재로써 나는 생을 일깨운다. 떨리는 손으로 어딘가에 기대어 너를 떠올리고 이내 마음을 수그러뜨린다. 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간지럽히는 듯하다. 봄날 꽃을 틔우는 소리처럼, 여름날 풀벌레 우는 소리처럼, 가을날 바람이 스치는 소리처럼, 겨울날 눈 밟히는 소리처럼 사계절 내내 내게 영원하였으면, 그리고 이 생이 영원히 반복되었으면 하고, 잠든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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