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지방지도는 할 말도 많고 사연이나 씁쓸한 감정도 겹쳐지는 자료이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무승부 혹은 승리했다 여긴 조선은 대원군의 명에 의해 전국 중요 군사기지 전체 지도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신미양요 1년 후인 1872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세상은 늘 아름답게 흘러가지만은 않은 것. 330여 개 군현과 100여 개의 군사기지 지도를 만드는데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어왔다. 엄한 교수님의 리포트 제출과 같았다. 다들 물어보지는 못하고 제각기 답을 내었으나 그 어느 것 하나 이 지도제작의 의도를 반영하지는 못하고 이전 고지도의 범주를 맴돌고 있었다. 특히 지역마다 화공이 있는 곳도 없는 곳도 있었고 화풍도 제각각이었기에, A+에서 D- 를 받은 보고서처럼 그리고 문체가 다르고 지문이 다르듯 같은 지역의 지도는 제각각 특색을 보여준다. 특히 예향이라 불리는 전라도는 풍경화에 가까울 정도로 압도적인 화풍을 보여준 반면 무미건조한 지도를 올리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정답 이거나 오답은 아니었다. 이 당시 이미 일본은 보부상으로 변장한 측량사가 비밀지도라는 명목으로 지형도를 제작 중에 있었던 것이 이미 밝혀진 지 오래이다. 이 지도로 얼마나 효율적인 나라 방어를 할 수 있었을까. 곧 운요호 사건이 터지도 역사는 우리가 기억하듯 그리 슬프게 흘러갔다.
이 지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슬프고 측은한 마음으로 지도를 바라보게 된다. 회광반조라는 말처럼 꺼지기 전 마지막 불꽃을 태운 촛불의 불꽃이 이 지도와 닮아있다. 조선의 마지막 고지도 제작은 실질적으로 이 지도를 피날레라 해도 좋겠다.
대구가 보이지 않는다. 경산 지도를 담아 보았다. 물처럼 담담한 지도에 담담하게 기록들이 적혀있다. 아래 지도는 전라도 강진현의 지도이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나는 두 지도에 평점을 줄 수가 없다. 다만 구한말로 달려가는 아련함이 두 지도에 담겨있어 오방색의 지도들이 처연해 보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