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계절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 ‘코헬렛’에 나오는 구절이다. 초록색 빛나는 새 잎이 나올 때가 있고 빛바랜 낙엽이 되어 땅에 나뒹굴 때가 있다. 해가 떠오를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다. 하루하루를 셈하지도 않는데 계절은 바뀌고 봄, 여름을 지나 가을이 깊어지는가 싶더니 오늘은 첫눈이 내렸다. 11월 중순, 아직 가을을 떠나보낼 준비도 못한 채 겨울을 맞이하여야 할 참이다. 나는 멀어져 가는 가을 끝자리 어디선가에서 서성이며 겨울의 초입에서 발길을 망설이고 있다. 이제는 좋든 싫든 겨울을 맞이할 때가 된 것이다.
11월 첫날 새벽이었다. 잠에서 깼는데 목 안이 갑갑하여 화장실에서 침을 뱉었더니 피가 검붉게 응고되어 나왔다. 입을 헹구고 자리에 누웠는데 자꾸 뭔가가 목 안에서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화장실에서 목에 있는 것을 뱉었는데 이번에는 빨간 피가 세면대를 붉게 물들였다. 다시 뱉으면 또다시 나오기를 반복하였다. 몸 안 어디선가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 달 전에 협심증으로 관상동맥확장 시술을 하고 나서 협심증 약을 복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 약을 ‘피를 묽게 하는 약’ 즉 ‘항응고제’라고 부른다. 혈관이 좁아지면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기게 되므로 피를 묽게 하여 혈액순환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약이다. 그런데 그 약은 심각한 출혈을 일으키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직감적으로 위장 쪽에서 출혈이 생겼다고 짐작하고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서 지혈을 하고 병실에 입원을 하였다. 다음날 의사는 촬영한 CT 영상을 보니 위장이 아닌 폐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무려 48시간 금식을 한 후 기관지내시경 검사를 하고 출혈 부분을 식염수로 씻어내었다.
작년 9월부터 올해 11월까지 1년여 동안 병원에 입원을 5차례나 하였다. 수술과 시술도 5차례 하였다. 66년을 살아오면서 잔병치레는 많았지만 입원을 한 적이 없었는데 몸 여기저기에서 순차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시작은 전립선비대증 수술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는데도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고 출혈을 하게 되면 얼마나 몸이 힘들어지는지 실감하였다. 어림잡아 예전의 몸으로 회복하는데 여섯 달 이상 소요되었다.
그다음은 다리의 통증과 저림, 그리고 보행 장애로 고생을 하였던 척추관협착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비수술적인 방법인 시술을 두 번 받았다. 허리도 수술을 하여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도 있었지만 연속적으로 수술을 받는 것이 두려워 간단한 시술을 하였다. 그런데 허리의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하여 몸이 많이 회복되었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가슴 통증이 심해서 응급실에 갔더니 심장의 관상동맥 혈관이 좁아진 협심증이라고 하여 관상동맥확장술이라는 시술을 받았다. 동시에 폐에도 문제가 생겼다. 폐에 염증과 미세한 구멍이 생겨서 폐의 공기가 폐 밖으로 새어나가 폐를 압박하고 있어서 공기를 빼내는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다행히 수술 전에 산소치료를 잘하여 수술 없이 상태가 좋아졌다. 폐와 협심증은 재발 가능성이 많고 특히 협심증은 약을 평생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퇴원 후 꼬박꼬박 약을 잘 먹으니 혈액순환이 잘되어 얼굴에도 화색이 돌고 발바닥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약을 먹은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폐에서 출혈이 생긴 것이다.
의사는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약은 계속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약을 먹지 않으면 심장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약을 먹으면 폐에서 또 출혈이 생길 것 같은데 어떻게 약을 계속 먹으라는 것인지. 약을 안 먹고 죽느냐, 먹고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진퇴양난이 바로 이런 경우가 아닐까. 협심증 약을 먹으니 이틀 만에 다시 조금씩 출혈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협심증 약과 지혈제 약을 동시에 처방해 주었다. 한쪽에서는 출혈을 시키고 한쪽에서는 지혈을 시키는 셈이다.
1년 동안 일어났던 몸의 여러 가지 변화는 노화가 주된 원인이라고 하였다. 노화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신체적, 정신적으로 쇠퇴하여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한다. 자연의 모든 생물은 노화의 과정을 거치며 죽어가고, 죽음을 통하여 공간(자리)을 내어주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 그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자연의 섭리이다. 그동안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으며 살아오면서도 ‘살아감’에만 몰두하였던 것 같다. 가족을 부양하고,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쌓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늙어감’과 ‘병들어감’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나이를 꽤 먹어 갈수록 주변에서는 아픈 사람,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때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지만 늙어가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을 진지하게 준비하지 못했다. 늙어가면서도 병들지 않기만을 바라고 죽음은 먼 훗날 있을 일이거니 불편한 진실처럼 애써 외면해 왔다.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삶의 한가운데에 정중히 받아들여야 한다.
창밖을 보니 갑자기 찾아온 늦가을 추위에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들만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기도를 한다. 나무들은 고난과 시련과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보내며 한 뼘씩 키가 자라고 무성한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비우고 나면 저렇게 경건해지는가 보다. 긴 침묵이 시작될 것이다. 맹렬한 추위와 세찬 바람이 온몸을 휘감으면 나무들은 윙윙거리며 신음소리를 내게 될 것이다. 겨울은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생명이 숨을 죽이는 계절이다. 그러나 겨울은 화려함과 풍족함 뒤에 오는 허영과 자만을 버리고 침잠하며 겸손하게 내면으로 들어가는 계절이다.
내 삶의 계절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나는 가을 끝자리, 겨울의 문턱에 서서 무엇을 주저하고 있을까. 손에 잡히는 부유함과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때는 지났다. 아프고 병들고 더 늙어갈 것이다. 겨울은 말한다. 저 나무들처럼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한 겹 나이테를 채우고 더 단단해지라고. 내면을 살찌우라고. 내 인생의 봄 여름 가을은 지나갔다. 그래도 나에게는 겨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