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봤다
얼마 전에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만났는데,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
얘네들은 내 나이를 모른다.
난 그게 뭐 별 거라고 알려준다고 했는데, 이들은 그것을 지금까지 계속 궁금해 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올라하는 그 모습을 더 보고 싶어서 한 20분은 더 뜸을 들인 뒤 말해줬다. 헤헷.
나는 수업을 하면서 내 정보를 그렇게 많이 공개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수업과 관련된 내용을 설명하고 학생들에게 배경지식을 끌어들여 설명을 하다 보면 은연 중에 나오는 경우도 있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나의 추억 등. 지금에야 웃으며 말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이지 끔찍했던 추억도 썰로 풀 때가 있다.
가끔은 알려줄 것처럼 하면서 일부러 숨기는 경우도 있었다. 나이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종의 성취 목표처럼 수업에 집중해서 끝까지 오면 알려주겠다는 당근 목적이 있겠고, 또 하나는 간혹 나이가 많은 친구들이 있어 얕보일까 봐 숨기는 것도 있다. 가장 큰 목적은 강사의 개인 정보를 과하게 내어 주어 필요 이상 친해지면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까 봐서였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과하게 친해지지 않고, 너무 서먹하지 않는 선에서.
나는 좋아하는 영화는 주기적으로 정주행을 한다. 뭐, 미칠듯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손이 자연스레 가기 때문이다. 신작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가운데 반가운 옛친구를 만나듯 무심코 클릭해버리는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는 너무나 큰 주제들이 한 작품에 꾹꾹 눌러 담겨있다. 인간의 존엄성,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전쟁의 참혹함과 현실 등 할 얘기가 밤을 새도 모자를 작품이다. 국으로 치면 멸치, 사골, 닭, 바지락 등 담백하고 묵직한 맛을 꽉꽉 채워 담은 그 어떤 무지막지한 국요리일 것 같다. 거의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지만 최근에 정주행했을 때 나는 주인공인 밀러 대위(톰 행크스)에 눈이 꽃혔다.
매번 원픽이 바뀌는데는 이유가 있다. 한창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을 때는 저격수 잭슨이 십자가에 키스하는 장면을 보고 간지를 느꼈고, 분석 뽕에 꽂혔을 때는 발암캐릭터라 여겼던 업햄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검사할 때마다 바뀌는 MBTI 결과처럼 이번에는 남들 가르치는 직업이다 보니 밀러 대위에 꽃힌 모양이다.
그의 과거에는 상금이 걸려 있었다. 300달러가 쌓이도록 그가 말하지 않은 이유는, 뭐 처음에는 큰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휘관으로서 알리지 않는 것이 이 빡세고 빡센 팀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보기도 한다. 계속해서 죽어나가는 동료들이 있기 때문에 과거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전쟁터에서는. 그래서 알리지 않은 것이다. 뭐, 나는 이것보다도 지휘관으로서 병사들과 일정선의 거리를 둔 것으로 본다. 너무 친해지면 명령이고 뭐고 먹혀들지 않는다. 특히나 억세고 억센 이 레인져 부대에서는 다들 한 성깔을 할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의무병 웨이드가 죽자 이를 두고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말리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밝힌다. 사실 그가 무리하게 밀어붙인 작전이었는데, 이것이 다들 불만을 품은 라이언 일병 구출 작전 과정에서 생겨난 불필요한 희생이라 생각한 부대원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사실, 자신의 과거를 밝힌 이유는 본인의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한 것도 있겠고, 부대원들마저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다. 다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카드를 하나 꺼내 보이며 또 다시 팀을 단합시키는 묘수로써 작용한다. 이 한 순간을 위해 참은 300달러어치 궁극기.
나는 밀러 대위처럼 뭔가 거대하고 거창한 이유가 있어 정보를 밝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몇 가지 목적은 있었지만, 이게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사에게는 관심이 없다. 요즘 들어 참 놀것 많은 한국인데 공부가 눈에 들어 오겠나? 하물며 그걸 시키는 선생에게?
그래도 그 관심 드럽게 없는 4시간 동안 몇 가지 포인트를 잡아 애들에게 꾸역꾸역 요점을 머릿속에 넣어주기 위해 나는 별의별 행동을 다 동원한다. 연기도 하고 웅변을 토해내기도 하고, 다그치기도 하고, 궁금증을 유발한다음 학기 끝까지 안 가르쳐주기도 한다. 애들을 약올리고 구슬리는 것이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했지만 지금은 학생들 집중시키는 몇 가지 방법 중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별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하나의 특별한 에피소드로 기억되면 이때 들었던 한국어 단어나 표현은 꽤나 긴 시간 기억에 남기 때문에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