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을 떠나 강릉에서 삽니다 -
부모님과 새미의 만남은 예상보다 수월하게 흘렀다.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과 강릉이주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꺼내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둘 다 중요한 사안이다 보니 설득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어찌나 막힘없이 이어졌는지 준비해 놓은 답변도 사용하지 못했다. '허락'이라는 단어를 듣기 위해 2주 넘게 머리를 부여잡고 계획을 짰는데 이토록 쉽게 허락을 얻다니! 긴장이 풀렸는지 맥이 탁 풀렸다. 사실 일이 순조롭게 풀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존재했다.
누나와 나는 예전부터 종종 서울을 떠나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둘이 강릉살이에 대한 꿈을 신나게 떠들면 옆에서 어머니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말리기보다는 '얘네들 또 시작했네'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 않고 잠자코 가부자를 튼 채 명상에 잠겼다. 이야기 나누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이따금 만류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크게 지지도 반대도 않고 가만히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강원도에 대한 즐거운 추억만 가득한 우리와 달리, 부모님들은 어릴 적 힘겹게 자란 이른바 고생했던 장소이다. 갖은 노력을 다 해 서울로 왔는데, 정작 자녀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다니. 내게 말은 안 하셨으나 속으로는 가지 말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평소 누나와 강릉에서 사는 이야기를 자주 나눠서인지 PPT 자료를 완성할 때도 곧바로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예전부터 부모님에게 강릉으로 가고 싶다고 거침없이 표현한 나였다. 적어도 반대는 안 하시겠지. 은연중에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내 예상과 사뭇 달랐다. 안 내켜했다. 두 분 다 자료를 본체만체 모르쇠로 일관했다. 특히 어머니가 그랬다. '뭐지? 반대한다는 의사표현인 걸까?' '관심이 있다면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을 텐데.' '아씨 미치겠네.' 부모님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적잖이 신경 쓰였다. 그 때문에 새미와 함께 만나는 날, 두 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걱정됐다.
그런데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부모님은 우리의 강릉 이주를 적극 지지해 주었다. 새미에게 고집 많고 외골수인 내 성격을 좋은 면만 부각해서 말해 주었다. 집에서 있을 때와 딴판이다. 나는 옆에서 말할 타이밍도 잊은 채 그저 벙 쪘다. 우리 부모님은 처음 만남부터 식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의 결혼과 강릉살이를 응원해 주었다. 예상과 다른 지지 반응에 적잖이 당황했다. 혹시 부모님은 PPT 자료를 본 시점부터 마음의 준비를 한 게 아니었을까? 새미와의 결혼도 강릉 생활도 말이다. 지금 이렇게 새미에게 말을 거는 이유는 아마도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나 하나 믿고 강릉으로 가는 새미를 위해 조금이라도 마음 놓을 수 있도록 말이다. 긴장을 푼 새미가 준비해온 '복순도가' 막걸리를 아버님께 건네드린다. 덕분에 분위기가 더더욱 화기애애해졌다. '다행이다. 절반은 끝났어.'
다음은 새미네 부모님이다. 부모님을 만나 뵈는 자리는 이번이 세 번째다. 다만 지금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결혼과 강릉 이주 이 두 가지를 허락받아야 하는 중요한 자리다. 압박감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행여나 말을 더듬기라도 하면 새미네 부모님도 나를 불안해하실 것이다. 그러니 긴장은 유지하되 차분하게 말하도록 마음을 가다듬도록 하자. 눈을 감은 채 얕게 심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새미네 부모님은 야탑역 근처 자주 가는 조개구이집에서 만났다. 저녁 식사 시간은 평화롭게 흘렀다. 아버님은 중간중간 내 술잔이 빌 때마다 술을 채워 주셨고, 나도 그때마다 두 손을 내밀어 술잔을 받고 또 채워 드렸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정도 배도 채우기 분위기도 무르익은 듯했다. 나는 테이블 아래 놓은 종이 상자를 꺼내 아버님께 건네 드렸다. 2주 전 일본 출장을 다녀오면서 사 온 XO급 헤네시 코냑이다. 앞으로 있을 중대 발표에 앞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다행히 아버님도 마음에 쏙 드신 듯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 우리는 부모님께 긴히 이야기할 것이 있다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두 분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 후 무언가 예상한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미와 사귄 지 6개월이다. 슬슬 결혼 이야기를 꺼내도 이상하지 않은 시기였다. 장소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마침 새미네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카페가 열려있어 그곳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메뉴를 주문한 다음, 사람이 거의 없는 창가 끝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어머니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노트북을 보며 말을 꺼냈다.
"그래 무슨 준비해온 자료가 있는듯한데, 어디 한 번 보여줘"
어머님 말씀에 따라 전원을 켜고 PPT 자료를 준비했다. 그 사이 진동벨이 울렸다. 카운터에서 음료를 가져와 부모님 앞에 음료를 놓은 후, 우리는 자리에 앉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새미와 함께 강릉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새미와 어떻게 생활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강릉 이주 계획 PPT 자료를 열었다. <우리들의 향후 10년간 계획> 그 순간 두 분의 움직임이 멈췄다. 당황하셨는지 미동도 않은 채 모니터의 화면만 바라보았다. 우리 테이블 주위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난 후, 어머니의 입에서 한 마디가 떨어졌다. "그래 계속 보여줘 봐"라고.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페이지씩 자료를 넘기며 설명했다. 우리가 수도권을 떠나 강릉에서 살고 싶은 이유, 강릉에서는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지, 만약 실패할 경우 어떠한 보완책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 조목조목 이야기했다. 행여라도 도중에 멈춰 세울까 봐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약 10여 분 간, 준비한 자료를 다 보여드리면서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발표를 끝낸 후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새미네 부모님 눈치를 살폈다. 두 분 다 아무 말이 없다. 한동안 모니터 화면을 응시한 어머니께서 말을 꺼내셨다.
"나는 좋은데?! 둘이 행복하게 산다면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지. 여보도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는 카페에 들어선 직후부터 줄곧 말이 없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할 말을 잃으신 걸까... 하지만 딸도 강릉으로 가고 싶어 하고 옆에서 아내도 찬성하니 당장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는지 몇 가지 질문을 건넸다.
두 분께서는 우리 답변을 들은 다음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버지께서 내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셨다.
"그래, 잘해보자"
굳은살이 베긴 아버님의 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진짜 허락받은 거야?' 마침내 새미네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것이다! '됐다 됐어!! 이제 진짜 강릉에서 지낼 수 있어!' 새미와 신혼 생활을 강릉에서 시작하는 거야! 나름대로 치밀하게 자료를 준비했지만 실제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로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단번에 승낙을 받다니!! 이 이상 좋은 결과는 없다.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카페를 나와 집까지 새미네 가족을 바라다 드렸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9408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다음날 아침. 이른 아침부터 새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거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오빠, 아빠가.. 이건 아닌 것 같대... 다시 생각해 봐야겠대."
그럼 그렇지. 어쩐지 술술 풀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