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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띄우는 편지 - 지킴이

by 고래뱃속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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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출근길

만원 버스에 올라, 사람들 틈에 끼어

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당신을 봤어요.


마음이 가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포기하고 다음 차 타려는데

등 뒤로 어느 손이 닿아 오더니

단숨에 나를 칸 안으로 밀어주었지요.


놀라서 돌아보니

당신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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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타고 먼저 가라고

가는 길 만들어 주겠다며

기합 넣고 등을 팍팍 밀어주던

막 처음 본 당신의 얼굴.

왜 그리 내게 힘을 내주었어요. 벅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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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퇴근길

하루치 기운을 다 쏟고 나서

홀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당신을 봤어요.


노란색 점포 불빛 속에서

어둔 골목길 안쪽까지 닿아 오던 음식 냄새와 그릇 소리.

이미 밤이 깊었는데, 밥을 짓고 문을 열어 두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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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먹고 오는 거냐고

말을 걸어 주었지요.


막 처음 들은 당신의 소리,

방금까지 배 채울 생각일랑 없었는데

왜 그리 손맛이 좋아요,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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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날마다 손수 일군 밭.

난 걸음 한 번 한 적 없이 살았지요.


한 날엔 농사지어 난 땅콩이며 감자와 상추들

품에 안고 나를 찾아와 준 당신을 봤어요.


땅콩은 강한 불에 볶고 상추는 맑은 물에 깨끗이 씻어

든든히 싸 주는 당신.

왜 이리 수고스런 일을 해요, 미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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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 세어 가며 살아 보니

여기저기 당신들의 손길이 참 많아서

마음이 놓여요.

지켜 주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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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보았을 때,

당신도 나를 보았겠지요.


이번엔 나도 할 수 있을까요?
당신처럼.




글: Editor 영




비밀 결사대, 마을을 지켜라|박혜선 글·정인하 그림|2021년 2월 8일|11,000원

산 아랫마을, 마지막 남은 세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동물들의 특별한 이야기
자식들 이름 따라 진수네, 경애네, 숙자네…
오늘은 잊었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마을에 남은 마지막 주인인 세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비밀 임무를 펼치는 산짐승들의 이야기. 주름진 할머니의 손길과 역동적인 동물들의 움직임이 손끝에 느껴질 듯한 부드러운 시골 풍경 속에 넋 놓고 머무르다 보면, 어디선가 산메아리가 울린다. 우리에게도 텅 빈 땅이, 가슴 한 구석 시큰해지는 이름이 있지 않느냐고. 이제는 그 땅의 계절들을 힘껏 일구며, 그 이름 힘껏 부르며 살아가 보지 않겠냐고. 때론 시끄럽고 때론 속 깊은 몸짓을 주고받으며 우리 함께 ‘비밀 결사대’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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