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래분수 Jan 05. 2020

피데에서 케사디야까지

캐슈 치즈로 만드는 케사디야

피데pide는 지중해 연안과 중동에서 즐겨 먹는 빵인 피타pita의 터키식 이름이다. 피데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케밥을 싸서 먹는 피데, 라마단을 위한 피데, 피자 같은 피데. 첫 번째 담백한 피데는 케밥 가게에서 종종 즐겨 먹었지만, 라마단 피데는 먹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피자 같은 피데는 터키를 생각할 때면 떠오른다. 요즘처럼 문득 생각나더니 며칠씩 내 머릿속을 맴돌기도 하고, 그때 함께 여행했던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게 한다.  

이 피자 같은 피데는 이탈리아식 피자와 달리 토마토소스를 쓰지 않는다. 모양은 나룻배처럼 생겼는데, 빵 반죽을 길쭉한 타원형으로 잡고 그 위에 재료를 올린 다음 반죽 양 끝을 뾰족하게 만져서 배 모양을 만든다. 주재료는 치즈이며 여기에 버섯, 토마토, 양파, 피망, 파슬리, 소시지, 다진 고기 등을 올려서 굽는다. 수프림 피자처럼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쓰기보다 치즈에 한두 가지 재료를 추가하거나 양념한 고기를 올려 먹는 게 흔하다. 처음으로 맛본 피데는 터키 아나톨리아고원 도시인 콘야였다.


나룻배 모양의 피데를 먹기 좋게 썰어 대접한 버섯 비데


친구와 함께 콘야에 갔을 때는 십이 월 초였다. 어느 늦은 아침 손을 호호 불면서 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 안은 터키의 여느 카페들처럼 청년부터 노인까지 남자들뿐이었다. 그들은 동작을 멈추고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어색함에 대처하는 방법은 터키 땅을 여행한 지 사흘쯤 되었을 때 터득했다. 이쪽에서 능청스럽게 “메르하바!” 하고 인사하면, 저쪽에서도 밝게 웃으면서 “메르하바!”라고 대답한다. 빤히 쳐다볼 때의 메마르고 그늘진 표정이 순간 사라지고 해맑은 미소로 덮이는 얼굴들. 이건 터키 거리를 걷는 재미가 되었다.

식당은 안쪽에 낮은 층을 하나 더 올려서 접대 공간을 늘렸다. 위층은 아래층보다 천장이 낮은데도 거리를 향한 통유리 창덕분에 실내가 밝았다. 우리는 위층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에는 겨우 예닐곱 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나마 메뉴 아래쪽 서너 개는 싼값으로 보아 음료수나 요구르트 종류로 짐작되었다. 메뉴판에서 읽을 수 있는 단어는 뵈렉 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그게 뭔지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었다. 첫 번째 메뉴는 건너뛰고 두 번째와 네 번째 메뉴를 가리켰다.

우리 앞에 고기와 치즈를 올린 길쭉한 빵이 얇게 썬 무와 곁들여서 나왔다. 빵 너비는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편안히 잡히는 정도로 한입에 넣어 베어 물기 알맞았다. 빵 반에 치즈 반 정도로 재료를 적절히 분배해서 치즈 맛이 너무 강하거나 빵 맛이 물리지 않았다. 짭짤하고 구수하면서 바삭바삭했다. 친구와 나는 눈에 감동을 싣고 입을 쩍쩍 벌렸고, 메뉴판에 적힌 뵈렉이라는 이름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에틀리 에크멕. 치즈 뵈렉. 모둠. 소고기 뵈렉.


뵈렉과 피데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 식당은 메뉴판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린 에틀리 에크멕으로 유명했다. 에틀리 에크멕은 ‘고기 빵’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반죽을 아주 얇게 펴서 그 위에 양념한 다진 고기를 올려 굽는다. 에틀리 에크멕의 고향이 콘야이다. 하지만 터키어를 할 줄 몰랐고 여행책을 펼쳐보며 여행하지도 않는 데다가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정보를 알 리가 없었다. 메뉴판 위의 ‘ETLiEKMEK’이라는 단어를 읽을 수 없는 사정도 메뉴 선택에 큰 몫을 했다.

Börek은 이스탄불에서부터 많이 봐온 단어였다. 다만, 뵈렉이 페이스트리 반죽에 속을 채운 파이 같은 음식을 뜻한다는 걸 몰랐다는 점은 천만다행이었다. 아침으로 기름진 페이스트리를 먹고 싶진 않았으니까. 더욱 다행이었던 점은, 이 식당 메뉴의 뵈렉은 파이가 아니라 피데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메뉴판에 보이는 대로 뵈렉을 시켰지만, 실제 나온 음식은 터키의 다른 지역에서 보통 말하는 피데였다. 왜 콘야의 이 식당에서는 피데를 뵈렉으로 부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이 맛을 잊지 못하고 다른 도시에서 뵈렉을 주문하면, 약간 기름지고 축축한 반죽에 싸인 음식이 나와서 실망했다. 우리가 먹은 그 맛있는 뵈렉을 다른 도시에서는 피데라고 한다는 걸 알아내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콘야 볼루 식당 Bolu Lokantasi의 '뵈렉이라고 주문해야 하는 피데'


메블라나 루미

이 가게의 피데는 다른 지역에서 먹는 피데와 모양이 약간 달랐다. 배 모양이긴 한데 그 길이가 매우 길었다. 보통 피데의 네댓 배로 반죽을 늘려 펴서 재료를 올려서 굽고, 한 뼘 길이로 잘라서 대접한다. 이렇게 길쭉한 콘야식 피데는 메블라나 피데라고도 불린다. ‘우리의 지도자’라는 뜻을 가진 메블라나Mevlana는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레비 교단Mevlevi Order(아랍어로 마울라위야Mawlawiyya회 라고도 함)을 창시한 잘랄 앗 딘 루미Jalāl ad-Dīn Muhammad Rūmī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13세기 이슬람 법학자이자 시인인 루미는 페르시아 태생으로서 터키의 콘야에서 활동하고 이곳에 묻혔다. 당시 이슬람 신비주의자(수피Sufi)들은 율법과 형식에 얽매여 대중에게서 멀어진 정통 이슬람에 회의를 느끼고, 금욕적인 자기 수양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꿈꾸었다. 루미는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는 명상으로 신에 가까이 가는 길을 제시했고, 그 길을 따르는 도구로써 시와 음악, 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사랑과 관용을 바탕으로 한 루미의 사상은 아나톨리아에 그치지 않고 그의 고향인 이란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까지 뻗어 나갔다.

루미 사후 그의 아들과 루미를 따랐던 자들은 메블레비 교단을 세웠고, 루미가 명상법으로 강조했던 춤은 세마Sema(페르시아어로 sama)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세마 의식을 행하는 수도사들을 세마젠Semazen 또는 빙글빙글 도는 데르비쉬 Whirling Dervish라고 한다. 세마젠은 양손을 하늘로 활짝 펴고 한 방향으로 돌면서 자아와 욕망을 버리고 진실을 찾아 내면으로 들어간다. 한 시간 이상씩 계속되는 회전으로 세마젠은 무아지경을 경험하며 신의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수련을 통해서 구도자는 믿음, 종족, 계급에 따른 차별과 적대를 떠나서 인류를 사랑으로 포용한다.

루미의 사상과 문학 작품은 서구 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다. 유네스코는 루미 출생 800주년을 기념해 2007년을 ‘루미의 해’로 정했고, 세마는 2008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이 되었다. 세마는 터키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나 이집트 등지에서도 만날 수 있다. 터키의 세마젠 의상은 흰색이지만, 이집트에서는 다양한 색깔로 만든 치마 모양의 의복(타노우라tanoura)을 사용한다. 카이로에서는 관광문화 상품으로 공연되는 타노우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집트 카이로 타노우라 공연


이슬람 소수 종파인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은 1925년 이래 터키에서 금지되었다. 현재 터키에서 공연되는 공식 세마  공연은 종교가 아닌 역사문화 행사로 이뤄진다. 매년 12월이면 콘야는 메블라나 축제를 개최하고 세마를 선보인다. 콘야는 루미의 흔적을 찾는 무슬림들의 순례지가 되었고, 루미가 활동하기 천이백 년 전쯤 사도 바울이 다녀갔다고 하여 기독교 순례자들도 이 도시를 찾는다. 콘야의 역사는 한 산에서 발견된 주거지 터에 근거해 기원전 3천 년 전으로 올라간다. 이후 이 도시는 프리지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문명 영향권을 거쳤고, 13세기 전후 셀주크 왕조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근대에는 이스탄불과 연결되는 철도 개통으로 다시 인구가 늘어나며 중앙 아나톨리아 고원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친구와 나는 이 유서 깊은 도시를 징검다리 건너듯이 하룻밤 묵고 지나쳤다. 메블라나 축제 직전이었기 때문에 세마 춤도 못 보았고, 루미의 시 한 점도 읽어보지 못한 방문이었다. 하지만 콘야는 우리에게 피데라고 부르지 않는 그들의 피데를 남겼다.



캐슈 치즈

남편에게 콘야에서 찍었던 피데 사진을 보여주면서 치즈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남편은 인터넷으로 비건 모짜렐라 치즈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더니 발효 냄새 풍기는 덩어리를 뚝딱 만들었다. 또띠야 두 장 사이에 캐슈 치즈를 발라서 오븐에 살짝 구운 이 케사디야를 남편은 그날 저녁 식사의 전채요리로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케사디야를 먹은 게 언제였던가? 기대하지 않았던 요리와 깜짝 놀랄 만큼 좋은 맛에 주요리가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도대체 재료가 뭔데 이렇게 금방 만들어냈어?

캐슈넛, 전분, 소금, 뉴트리셔널 이스트, 그리고 물. 타피오카 전분이 없어서 감자 전분 썼는데, 다음에 사서 다시 만들어보자. 타피오카 전분이 좀 더 치즈 질감과 비슷하게 해 준다네?

재료가 그게 다야?

응. 진짜 맛있다. 다음에는 넉넉히 만들어서 냉동실에 얼려보자. 아마도 진짜 치즈처럼 갈아서 쓸 수 있을 거야.

그래! 여기에 한천 가루를 섞으면 어떨까?

그러면 쫄깃하니 치즈랑 더 비슷할지 모르겠다. 그것도 해 보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쩍쩍 벌리면서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치즈처럼은 아니어도 살짝 실처럼 늘어나고, 열에 녹은 치즈 느낌은 그대로다. 바삭하게 구워진 옥수수 또띠야에 달라붙은 노르스름한 덩어리가 부드럽게 씹힌다. 캐슈넛의 담백함에 단맛이 가볍게 어울리고, 식으면 좀 짜다 싶겠지만 따뜻할 땐 딱 좋을 만큼의 짭짤함이 입맛을 돋운다. 여기에 버섯을 조금 썰어 넣으니 콘야에서 맛본 피데 맛이 언뜻 떠오른다. 이제 빵 반죽만 만들면 피데도 만들 수 있겠다. 하지만 만들기 간단하면서 맛 좋은 이 케사디야를 며칠만 더 즐기고, 그리고 피데를 만들어도 되겠지.


밤새 내린 눈이 녹아 처마에 달렸다가 똑똑 떨어진다. 하늘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흐리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흐른다. 보일러를 꺼 둔 지 좀 되어 집안 기온도 내려갔다. 오후 네 시 십 분. 냉동실에 넣어둔 캐슈-타피오카 덩어리를 꺼낸다. 오븐을 달구기가 좀 아까워서 프라이팬에 구워보려 한다. 캐슈 치즈를 강판에 갈아서 또띠야 위에 고루 얹고, 양송이버섯 두어 개를 썰어 올린다. 마지막으로 또띠야 한 장을 더 올려 덮고 양쪽 면이 노릇해지게 굽는다. 금방 구운 케사디야에 칼을 대고 누르니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김이 새어 나온다. 이번 겨울은 이 케사디야 덕분에 더 따뜻하고 더 맛있을 것 같다.






캐슈-타피오카 치즈 (비건 모짜렐라 치즈)


재료 준비

물 1컵

캐슈넛 반 컵

타피오카 전분 4큰술*

뉴트리셔널 이스트 1큰술

소금 1작은술

마늘 2쪽

식초(혹은 레몬즙) 1작은술


*한천 가루를 섞으면 재료가 더욱 잘 엉기고 탄력이 생긴다. 한천 가루 1작은술을 넣으면 타피오카 전분 1큰술 정도 덜 넣는다.


(조리법 참고 https://itdoesnttastelikechicken.com/melty-stretchy-gooey-vegan-mozarella/)



만들기

1. 캐슈넛은 하룻밤 물에 담가 둔다. 혹은 캐슈넛을 20분 정도 끓여서 부드럽게 한다.

2. 캐슈넛과 모든 재료를 믹서에 넣고 간다. 캐슈넛 덩어리가 남지 않도록 곱게 간다.

3. 2번을 냄비에 넣고 중간 불에서 끓이되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저어준다. 4~5분 정도 지나 재료가 서로 엉겨 붙기 시작하면, 불을 약간 줄이고 2~3분 정도 더 저어주면 충분하다.

4. 식혔다가 냉장(1주일 이내 소비)이나 냉동 보관한다. 얼린 캐슈 치즈는 강판에 갈아서 쓸 수도 있다. 케사디야, 샐러드, 샌드위치, 햄버거, 피자, 떡볶이 등에 다양하게 활용한다.

 

*믹서에 갈 때 물은 반 컵만 넣고, 나머지 반 컵은 재료를 냄비에 옮긴 뒤 믹서를 헹구는데 쓰면, 재료를 낭비하지 않게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