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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분수 May 28. 2020

세계의 밥 1

쌀이 있어야 밥을 하지

코로나19로 미국 연방 정부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얼마간 잠을 설쳤다. 당장 생활하는데 부족한 건 없었다. 하지만 개장 시간부터 꽉 찬 슈퍼마켓 주차장이나 텅 빈 선반들을 보고 나니 불안했던지,  얼핏 잠이 깨면 충분히 사지 못한 것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이를테면 쌀과 콩, 밀가루 같은 음식부터 물이나 라이터, 번갯불 같은 비상용품에 천 마스크 재료까지. 어떤 밤에는 잠결에 지금이 코로나 시대라는 게 떠오르면 잠이 확 달아나곤 했다. 무엇보다 쌀이 걱정이었다.

그동안 쌀은 덴버 지역의 한인 가게에서 샀다. 한국 쌀을 대량으로 싸게 살 수 있고, 비싸지만 유기농 현미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안전 문제로 덴버에 갈 일이 줄줄이 취소되었고, 어쩔 수 없이 지역에서 쌀을 구해야 했다. 쌀 사기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대부분 소포장인 데다가 가격까지 생각하면 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주를 흘려보냈고 비상사태가 선포되자 그마저도 선반에서 싹 사라졌다. 집에 쌀이 똑 떨어진 건 아니었다. 한 주에 한두 번쯤 밥을 짓고 대여섯 끼를 먹는 정도니 한 달은 거뜬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만약 공급 차질이 계속되면? 밀가루보다 쌀이 꼭 있어야 했다.

올해 첫 양봉을 시도하려는 남편은 설탕 때문에 안달이었다. 4월 중순에 벌들이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벌들이 자리를 잡는 첫 두 주 정도는 설탕물을 준다고 했다. 7시 좀 지나서 먼저 월마트에 도착했다. 흰설탕 두 포대가 필요했지만 설탕과 밀가루 선반은 비어있었다. 밀가루는 이해하겠는데 설탕은 왜 동나는 걸까? 시골이라 모두 양봉을 하는 걸까.

혹시나 해서 쌀 파는 선반을 찾았다. 여기도 알뜰한 도둑이 다녀간 듯 거의 텅 비어있었고, 맨 아래 선반 안쪽에 현미 두 봉투만 남아있었다. 한국 쌀은 아니고 아주 얇고 길쭉한 쌀이었다. 2kg 정도 되는 봉지였는데 이런저런 공인 인증 표시가 하나도 없었다. 가능한 유기농을 선택하고 최소한 유전자 조작을 하지 않은 식품을 고집해 온 우리는 콧대 높게 돌아섰다. 그리고 우리가 식료품을 주로 사는 슈퍼마켓에 갔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 가게 한가운데에 곡물이나 콩, 견과, 말린 과일 등을 덜어서 살 수 있는 넓은 매대가 있는데, 말린 과일 쪽을 빼면 나머지는 완전히 비어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른 아침에 상품 정리가 미처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사재기가 휘몰아치던 때 그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사재기의 승부는 남보다 먼저에 달렸다. 내가 채소류를 카트에 담는 동안, 남편은 월마트로 돌아가서 농약 듬뿍 담은 쌀을 사 왔다.


비상사태 선포 후 두 달 반쯤 되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4월 말부터 외출과 영업 중지 행정 명령이 서서히 풀렸다. 작은 가게들이 문을 열었고 카페나 식당에서는 제한적으로 손님을 받기 시작했다. 그동안 슈퍼마켓에 갈 때마다 새로운 안내판이 나타났다. 식료품과 휴지 등 일부 품목은 반품 불가라는 경고문은 어느 가게에나 붙었고, 코로나19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정기 할인 행사는 무기한 연장이라는 아쉬운 문구도 있었다. 들어가고 나오는 문이 따로 정해졌으며, 동선이나 줄 서는 간격을 표시한 바닥 스티커가 등장했고, 직원 보호를 위해 계산대에는 가림막이 좀 앙증맞다 싶게 설치되었다. 무엇보다 피로함이 역력히 드러난 직원들의 모습이 사재기 광풍을 보여주었다.

한달 반 전부터는 놀랍게도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덩달아 실이나 끈 같은 마스크 재료가 동났고 나는 또 한발 늦었다. 오늘 월마트 입구에는 치과용 마스크 한 상자가 놓여 있었고, 건물 내에서 마스크 착용을 권고했다. 어금니가 부러져서 급히 치과에 갔을 때, N95 마스크를 쓴 의사가 덴탈 마스크를 쓰고 있는 간호사에게 ‘그건 바이러스 감염 방지에 충분하지 않으니 내 것 같은 걸 쓰거나, 키친 타월을 마스크 안쪽에 끼워서 착용하면 좋아요.’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고 의료진이 일터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황을 목도하기도 했다. 총과 총알이 잘 팔린다는 뉴스가 들렸고,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상용 라이터, 번갯불, 워키토키를 샀다.

제빵용 이스트는 아직 구할 수 없지만, 밀가루와 휴지가 돌아왔고, 한동안 늘어났던 마트 직원 숫자도 이전으로 돌아갔으며, 우리에겐 월마트 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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