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쌀 요리 _ 코샤리
쌀을 불리는 습관을 제대로 익힌 건 작년에 콜로라도로 이사 온 뒤부터다.
전에 살던 동네의 해발고도는 9m로 거의 바다 높이였지만, 지금 사는 곳은 합천 가야산 정상급인 1400m에 달한다. 처음 이사 오고 한동안 남편은 나에게 물을 많이 마시라고 계속 권했고, 사람들은 높은 고도 때문에 별 탈은 없는지 묻곤 했다. 이 지역이 매우 건조하긴 하지만 고도 때문에 느끼는 건강상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에 밥 익히는 시간이 두 배는 더 걸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밥 짓다가 중간에 뚜껑을 열고 뒤적였다. 그러자 남편이 뚜껑을 닫아두어야 열이 고루 퍼져서 충분히 익고 더 빨리 밥이 되는데 어떻게 다 된 밥을 뒤적거리느냐며 기겁을 했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는 남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로는 산에서 밥 지을 땐 뚜껑에 돌을 얹고 중간에 이렇게 섞어줘야 바닥이 타지 않고 고루 익는다며, 결혼 후 세 번째로 똑같은 논쟁을 다시 벌였다.
이튿날 남편은 몇 해 전 사놓고 안 쓰던 전기밥솥을 꺼냈다. 밥과 콩을 이 기계에 짓기 시작했더니 음식이 고루 익고 시간도 절약됐으며 밥 짓기로 싸우는 일도 사라졌다. 게다가 밥을 짓고 이틀 정도 보온 상태로 두고 따뜻한 밥을 먹는 호사도 가끔 누린다. 지붕에 달린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조금 만들고 있다는 사실 덕분에 자린고비 부부는 밥통의 이틀 보온에 동의했다.
자,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 시대. 우리 집에는 월마트에서 산 쌀이 밥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 쌀 봉지에는 ‘롱 그레인 브라운 라이스’라고 쓰여 있었다. 쌀에서 꾀죄죄한 물이 없어질 때까지 오래 씻어서 물에 담가 뒀다. 3월 하순, 집안 기온은 아직 17도 안팎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밥을 하려고 보니 쌀이 쌀알 모양이 아니었다. 낱알은 현미 색을 잃고 하얘졌고, 길쭉하게 터져서 바깥으로 반쯤 말려 올라가 있었으며, 손가락으로 집으니 저항 없이 뭉그러졌다.
그제야 이 얇디얇은 쌀은 굳이 물에 불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퉁퉁 부은 쌀이 두세 사발은 되었다. 나는 이상하게 불어난 쌀을 모른 척했고, 남편이 밥통에 넣고 찌다시피 밥을 지었다. 구수한 맛은 없어도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 쌀을 또다시 그냥 익혀 먹고 싶진 않았다. 색다른 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금방 익는 쌀이라면 기름에 볶고 즉석에서 익히는 필라프나 비르야니를 만들면 될 것 같았다.
필라프는 쌀에 향신료, 채소, 육류를 더 하고 물 대신 육수에 지은 밥으로 볶음밥처럼 생겼다. 필라프는 중동에서 유래해 동아프리카와 지중해 연안, 동유럽,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까지 전해졌고,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은 필라우, 뿔라우, 빠에야, 비르야니 등으로 달리 불리고 조리법도 변주했다. 비르야니는 인도 문화권의 필라프라 할 수 있다. 비르야니는 쌀을 반쯤 익힌 다음 그 물은 버리고 다양한 재료를 층층이 쌓아서 낮은 온도에서 뚜껑을 닫고 서서히 익힌다. 필라프는 비르야니와 달리 밥물을 버리지 않으며 중간 불에서 시작해 금방 익히는 게 특징이다. 물론 필라프보다 비르야니에 쓰는 향신료 종류가 더 다양하다.
우리 집 부엌 찬장에도 다양한 인도 향신료가 있다. 그런데 재료를 갖췄다고 진짜 인도 요리가 만들어지는 건 아닌가 보다. 집에서 만들면 인도 카레도 비르야니도 민숭민숭한 게 아무래도 인도식당의 그 강렬한 맛은 따를 수가 없다. 식당에서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향신료를 쓰거나 소금과 설탕을 듬뿍 넣기 때문일 거라고 자위할 뿐이다.
인터넷 요리법을 찾아 필라프도 만들어봤다. 비르야니나 필라프나 비슷한 거지 하곤 대충 따라 했으니 잘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채식하기 한참 전, 온갖 해산물을 다 넣고도 제맛을 못 낸 빠에야 역시 다시 만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월마트 쌀은 밥이 되어야 했다. 그러다 코샤리라는 이집트식 쌀 요리를 알게 되었다. 정통 코샤리는 육류를 사용하지 않으며 식물성 유지만 쓴다면 완전 채식 요리가 된다고 한다.
문제는 코샤리를 완성하려면 부엌에 있는 냄비는 죄다 꺼내 써야 한다는 점이다. 밥에 넣을 두 가지 콩과 파스타, 여기에 어울려 먹을 매콤한 토마토소스와 튀긴 양파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야단법석을 버텨낸다면, 기본 밥 짓기를 좀 못 해도 상차림이 얼추 이집트 밥상 느낌이 난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맛이 좋다. 매콤한 토마토소스와 튀긴 양파가 어눌한 이집트식 밥 짓기 솜씨를 보기 좋게 가려준다. 게다가 렌틸과 병아리콩이 코샤리의 기본 재료이니, 다른 반찬거리를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다.
코샤리는 향신료를 최소한으로 쓴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큐민과 고수 씨앗 가루 중 원하는 것만 쓰면 되는데, 예닐곱 가지 향신료를 섞은 것보다 그 향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니 신기하다. 이것저것 지지고 볶은 탓에 싱그럽다고 할 순 없지만, 풍성하고 향긋한 밥상 차림이 된다.
한 톨 한 톨 기름에 쌓인 밥알을 어금니로 지그시 누르며 이게 고수 씨앗 냄새구나 기억하려 애쓴다. 그다음 한 술은 매콤한 토마토소스에 풀풀 날리는 밥을 비벼서 떠먹는다. 그 알싸한 맛에 숟가락이 쉴 틈 없다. 기분이 날 땐 피타 빵과 타불레 샐러드, 타히니 소스를 만들어 아랍식 밥상을 꾸며본다. 코로나 시대에 삼 개월째 바깥 음식을 맛보지 못한 우리는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이집트 안 가도 되겠다!
기다랗고 얇은 쌀 대신 한국 쌀로 만들 땐, 고두밥처럼 물의 양을 적게 잡고 밥을 먼저 지어두면 편하다. 혹은 찬밥과 삶은 콩류가 있다면 모든 재료를 섞고 데우듯이 볶기만 하면 된다. 단, 찬밥도 좀 된 편이 좋고 찹쌀을 쓰지 않은 게 낫다.
재료
코샤리: 쌀 2컵, 렌틸 1컵, 고수 씨앗 가루 1/2작은술, 소금 1/2작은술, 파스타 2컵, 삶은 병아리콩 1컵
토마토소스: 양파 1/3개, 마늘 5쪽, 고수 씨앗 가루 1/2작은술, 고춧가루 1작은술, 토마토 페이스트* 100g, 소금, 후추, 식초 1작은술
양파 튀김: 채 썬 양파 1/2개, 밀가루, 기름, 소금
*토마토 페이스트 대신 생토마토 2개 정도를 써도 좋다.
만드는 법
1. 렌틸을 십여 분 삶고 체에 밭친다. 나중에 쌀과 함께 끓여야 하므로 완전히 익히지 않는다.
2. 냄비에 기름 1큰술을 두르고, 쌀과 렌틸, 소금, 고수 씨앗 가루를 넣고 3분쯤 볶는다. 약 3컵의 물을 넣고 20분쯤 삶은 뒤에 불을 끄고 뚜껑을 덮어둔다.
3. 파스타는 조리법대로 삶아 체에 밭친다. 삶은 병아리콩도 준비해둔다.
4. 밥을 짓는 동안 토마토소스를 준비한다. 냄비에 양파와 마늘, 고수 씨앗 가루를 넣고 3분 정도 볶다가, 토마토 페이스트와 고춧가루, 물 1컵을 넣고 5분쯤 끓인다. 불을 끈 뒤 식초를 넣고 저어주는데, 이때 입맛에 맞게 소금과 후추도 넣는다. 토마토 페이스트가 없다면 생토마토 두 개를 다져 넣고 2분쯤 볶은 뒤에 물을 붓고 되직하게 끓인다.
5. 양파 튀김으로 쓸 밀가루 2큰술을 접시에 준비한다. 양파 반 개를 얇게 채 썰고 밀가루(원하면 소금과 후추 추가)를 묻힌 뒤 튀긴다. 기름에 튀기는 대신 팬에 기름을 넉넉히 부어 볶거나, 튀김옷을 입은 양파에 기름을 조물조물 묻힌 뒤에 높은 온도에 맞춘 오븐에 반짝 구워도 좋다.
6. 2번 밥을 그릇에 반쯤 담고 그 위에 파스타, 병아리콩, 토마토소스, 양파 튀김을 올린다. 토마토소스는 따로 담아서 대접할 수 있다. 채 썬 오이, 토마토, 파 등을 고명으로 올린다. 마늘장아찌도 잘 어울린다.
긴 쌀, 중간 쌀, 짧은 쌀
쌀은 세계에서 사탕수수와 옥수수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작물로서 인류가 섭취하는 칼로리의 1/5을 담당한다. 쌀은 낱알 모양에 따라 롱 그레인, 미디엄 그레인, 숏 그레인으로 구분한다.
롱 그레인은 낱알 길이가 너비의 네댓 배가 되는 쌀을 일컫는다. 도정을 적게 한 브라운 롱 그레인, 도정을 많이 한 화이트 롱 그레인, 동남아시아에서 즐겨 먹는 재스민 쌀, 인도 지역이 원산지인 바스마티가 이에 속한다. 바스마티는 ‘향기롭다’는 뜻을 가졌는데, 견과 같은 구수한 맛이 강하고 꽃 향이 난다고도 한다. 다른 쌀보다 찰기가 덜 하고 가벼우며 익혔을 때 붙지 않는다. 바스마티는 비르야니나 필라프 같은 볶음밥을 만들거나 카레, 스튜와 어울려 먹는다. 바스마티로 밥을 지을 땐 쌀 1컵에 물 1컵 반 정도가 알맞다.
길쭉한 쌀과 달리 중간 길이와 짧은 길이 쌀은 그 구분이 모호하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밥상에 주로 오르는 쌀은 중간 길이로, 찹쌀은 짧은 길이로 구분하는 게 보통이다.
스페인에서 빠에야나 라이스 푸딩 등 후식류에 쓰는 쌀은 봄바bomba(또는 발렌시아 쌀)라고 한다. 봄바는 한국 쌀보다 찰기가 약해 달라붙지 않는 성질을 가졌고 물을 많이 먹는다.
이탈리아에서 리소토에 쓰는 아보리오Arborio도 봄바와 마찬가지로 낱알 길이가 짧다. 아보리오 쌀은 익혔을 때 조금 단단하지만 씹는 맛이 좋고 부드럽다. 리소토 말고도 푸딩을 만드는 데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