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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분수 Jun 20. 2020

엄마의 김치 남편의 된장

오물오물 냠냠 후루룩 짭짭

비 한번 맞이하지 않고 사오 월을 보냈다. 이번 주말엔 장독 정리를 하자고 한 게 벌써 몇 주째. 장독이라고 해봐야 작은 항아리 서너 개뿐이지만, 애써 담아둔 게 너무 짜질까 걱정되었다. 오늘 한낮 기온은 38도를 웃돌았다. 불덩이 같은 고추장 항아리를 안고 들어왔다.

골마지 생기지 말라고 얹은 김 석 장은 바짝 말라붙었다. 조심스럽게 김을 꺼내고 단단하게 굳은 윗부분을 주걱으로 걷어냈다. 그러자 부드럽고 윤기 흐르는 고추장이 나타났다. 병 세 개에 나눠 담고 냉장고에 넣었다. 그제야 생각이 나 이런저런 채소를 썰어 끓이고 식길 기다렸다가 굳은 고추장과 섞었다. 작은 항아리에 옮겨 담고 위에 소금을 뿌린 뒤 김을 얹었다. 얼마간 다시 발효해야지. 그러고도 남은 고추장에는 마늘 한 주먹을 섞어 병에 담았다. 병에 담자니 내 입이 또 이상하게 튀어나온다.

병 주둥이에 음식을 담을 때면 입술이 그 속으로 들어갈 듯 꿈질댄다. 엄마처럼. 엄마가 손주들에게 밥 먹일 때 숟가락을 아이 입에 들이대며 입술을 움찔거리는 걸 봤다. 행여 음식물을 흘릴까 오물오물. 사십 년 전 나에게도 저렇게 밥을 먹이셨겠지. 그때 엄마가 먹여준 밥이 내 피와 뼈와 살이 되었고, 엄마의 표정도 내게 새겨졌다.


심하게 건조한 날에는 습도가 5%까지 내려가니 된장과 고추장이 바짝바짝 마른다.


엄마가 애 밥 먹이는 그 표정을 어제는 마흔여섯 번, 오늘은 서른여덟 번쯤 지었다. 다음 주말에 팔 김치를 작은 병에 나눠 담느라 입을 쫑그렸다 폈다 쫑그렸다 폈다. 어제는 덜 매운 배추김치와 백김치를, 오늘은 매운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담갔다. 다음 주 장터 나가기 직전에 오이김치만 담그면 된다. 코로나바이러스 유행에도 불구하고 올여름 직거래 장터는 예정대로 열린다고 한다. 대신 시식은 금지다. 시식으로 매출을 올리는 우리로서는 좀 아쉽지만, 작년에 이미 맛을 본 주민들이 찾길 바라며 참가 신청서를 냈다.

미국 콜로라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김치 장사를 하게 된 건 남편 때문이다. 우리는 5년 전쯤 채식을 시작했는데 유럽의 대도시에서 미국의 중소도시를 거쳐 시골로 이사 온 뒤 나가서 먹을만한 식당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남편은 식당을 운영해보고 싶어 했다. 꿈이 큰 건 장한데 요식업이라니 도저히 감이 안 잡혔다. 무엇보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질 식당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돌에 눌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작게 시작해보자고 남편을 살살 꾀었고, 직거래장터에서 김치를 팔게 되었다.


구하기 어렵고 비싼 부추 대신 고수를 넣어 오이김치를 만든다.


이 작은 가족 수공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귀찮았던 과정은 요리법 만들기였다. 눈대중으로 요리하는 나에겐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남편 말대로 일정한 맛을 위해 재료의 양을 정해야만 했다. 일단 요리법이 정해지니 편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료와 양을 남편 몰래 슬쩍 바꿀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맛에 놀라고 그걸 즐기며 거기에서 배운다. 내 주요 업무는 김치 만들기였고 한없는 당근 채썰기 끝에 남편에게 시비를 걸곤 했다.

남편은 김치 만드는 것 외에 온갖 행정 및 서류 업무를 놓치는 일 없이 해냈다. 장터 나가는 날 아침에 나를 깨우고 간식을 준비하고 아이스박스 네 개와 천막을 차에 싣고 운전했으며, 장사 뒤에는 경리 업무도 봤다. 그 여름 장사 끝에 우리 손에는 한국에 갈 항공권 값이 생겼고, 광장시장 근처에서 분홍색 채칼을 산 뒤 채썰기로 싸우는 일은 없어졌다.


한국에서 산 채칼은 칼날 부분이 단단하고 힘에 눌리지 않아 채소를 일정하게 썰어준다. 덕분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아낄 수 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우리 김치를 샀다. 재료는 뭐고 어떻게 만드는지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김치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김치에 젖산균이 많고 몸에 좋은 음식으로 알고 있었기에 따로 김치를 홍보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들은 시식 기회를 고맙게 여겼고, 김치의 아삭한 식감과 신선한 맛을 좋아했다. 먹어보면 맛있다 하고 곧 구매로 이어졌다. 물론 아닐 때도 많다. 이 경우 대부분은 한국에서 김치를 먹어봤다는 사람들이다.

한 여자가 새초롬하게 다가와 ‘신김치’ 있느냐고 물었다. 신김치를 한글 그대로 말해서 하마터면 못 알아들을 뻔했다. 신김치는 없지만 이 김치들 삭히면 다 신김치 된다고 했다. 여자는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며 두 해 살았는데 신김치를 좋아한다고 했다. 눈치가 있길래 맛 좀 보라 했다. 여자는 한 입 깨물더니 이게 아니라며 맛보기 전에 이미 마음먹은 대로 돌아섰다. 남편이 나직이 말했다. “신김치 아니라니까.”

삼사십 년 전에 한국에서 군 생활을 한 아저씨들은 한국 어디에 있었다는 자기소개를 먼저 하며 다가온다. 그리곤 김치 맛을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어쩔 땐 한번 갸우뚱하는데, 하나같이 그 맛이 아니야 하고 돌아선다. 그럼 남편이 그 뒷모습을 보며 또 한마디 한다. “우린 젓갈 안 쓴다고 했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엄마가 제일 재미있어한다. 그러곤 젓갈 안 쓰고 어찌 김치 맛이 나냐고 의심을 떨치지 못한다. 엄마는 미국 사람들이 마늘 냄새 풍기는 김치 맛을 보고 싶어 하고 김치를 사러 다시 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 행여 자식이 몸 상할까 걱정스러운 말을 늘어놓는다.  

우리 김치는 젓을 쓴 김치보다 향과 풍미가 덜하지만 청량한 김칫국과 아삭한 배추 맛은 그대로다. 배추와 무청은 풋내 나지 않도록 얌전히 씻는다. 소금을 적당히 쓰고, 발효 중에는 공기 접촉을 최대한 줄이면서 이삼일쯤 익혔다가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럼 나머지 일은 소금과 채소가 알아서 한다.


김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먹기 편하도록 배추를 썰어서 김치를 담는다. 절인 배추 써는 것도 큰 일이지만 일단 배추가 절여져서 부피가 줄면 일이 크게 진척된 것 같다.


김치는 엄마에게 배웠다. 다 크고 결혼해서 엄마가 이제 배워야지 하고 가르쳐준 건 아니다. 어릴 때 엄마가 김치 담글 때면 싫건 좋건 나는 항상 엄마 곁에 있었다. 제일 힘든 장 보고 채소 다듬고 씻는 건 엄마가 다 했다. 특히 김장철에는 손 시리다며 채소 씻는 건 잘 시키지 않았지만, 찹쌀풀 만드는 건 언제나 내 일이었다. 풀이 냄비 바닥에 눌어붙지 않게 주걱으로 매 젓는 일은 깨 볶는 것만큼 지루했다.

엄마는 손에 양념을 묻히고서야 이곳저곳에 숨은 재료를 찾았다. “아이고, 생강 깜박했다. 저기 김치 냉장고 오른쪽에 있어. 좀 꺼내라” 하면 나는 양념에 풀을 덜다가 생강을 찾았고, 베란다 어딘가 엄마만 아는 곳에 숨겨진 묵은 젓갈을 찾아서 국자로 덜어오거나, 냉장고 서랍에서 검은 봉지에 든 고춧가루를 꺼내 매운 내 날리지 않도록 살살 양념 위에 얹었다. 언젠가부터 엄마는 고춧가루를 뺀 나머지 자잘한 재료는 믹서에 갈기 시작했고, 이때 사과도 함께 넣으면 설탕 넣은 듯 국물 맛이 달고 시원하다고 했다.

양념이 고루 섞이고 엄마 손이 벌겋게 물들면 침이 꼴깍 넘어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그럼 엄마는 노란 배추 속잎을 떼어 붉은 양념을 올리고 돌돌 말아서 내 입에 넣어준다. 그리고 꼭 물었다. “맛이 어떠냐? 너무 싱겁지 않냐? 적당히 짜야 간이 고루 배는데.” 그리곤 나중에 익히다가 싱겁다고 소금을 치면 김치 맛이 써지니 필요하면 젓갈을 쓰라는 말씀은 매번 빼놓지 않았다.

나는 생김치 맛보는 걸 좋아했지만, 그 맛이 어떤지 알아내는 건 참 어려웠다. 혹시라도 엄마가 “지난번에는 너무 싱겁게 돼서 아빠가 한입 먹고 쳐다도 안 보셨다.”라고 하면 맛보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내가 짠가 안 짠가 고민하며 혀를 굴리는 동안 엄마는 “좀 짠맛이 있어야 나중에 간이 고루 배는 거야.” 하고 꼭 다시 말한 뒤에 “어디 나도 맛 좀 보자. 음… 소금 좀 더 넣자. 저기 빨간 소금 통 가져와 봐.” 하곤 내 대답보다 앞서 나갔다. 그때는 엄마가 나에게 똑 부러진 미감을 바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배추가 덜 절여졌으니 양념에 소금을 좀 더 쳐야 한다거나 나중에 무를 좀 삐져 넣어 짠맛을 줄이겠다는 계획이 이미 있었던 것 같다. 머리가 굵어졌을 땐 엄마에게 “난 다 맛있어서 잘 모르겠어. 그래도 엄마는 꼭 물으셔. 나 믿지 말아요.” 하곤 굴을 곁들인 생김치 맛을 즐기기만 했다. 싱겁든 짜든 일단 김치 만드는 게 끝나면 나하곤 상관없었다. 엄마가 해결했으니까. 무를 썰어 넣거나 젓갈을 치거나 했겠지.


오이김치로 전을 부칠 수 있다는 건 오이김치가 시어빠지도록 흔해지고서야 알았다. 반죽에 옥수수 가루나 코코넛 가루를 섞어도 맛이 좋다.


지난 십 년 동안 외국에 살며 김치 없어 못 산 적은 없다. 현지 음식으로 충분했고 필요하면 손이 많이 가는 김치 대신 무 피클을 만들었다. 그런데 여행과 뜨내기 삶을 마치고 한 곳에 정착하니 좀 달라졌다. 삼시 세끼 만들어 먹고 밥을 짓다 보면 김치 생각이 났다. 그러다 시간이 생기면 김치를 만들었고 한국 슈퍼마켓에서 사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김치는 항상 귀했고, 어쩌다 꺼내서 두어 숟갈 덜어 남편과 나눠 먹곤 했다.

일부러 김치를 먹지 않던 때도 있었다. 김치는 너무 짜고 자극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언제나 그랬듯이 김칫국까지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짠 거 너무 많이 드시지 말라고 말했고, 속으로 엄마의 밥 먹는 모습은 우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먹는 데 너무 공을 들였다. 장보기에 많은 힘을 쏟았고, 잔뜩 짊어지고 끌고 온 만큼 식자재 다듬으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엄마는 평생 듣는 아빠 잔소리에 굴하지 않고 뭘 만들든 넉넉히 만들어 냉장고를 채웠다. 먹고 먹이기 위한 활동이 엄마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내 부엌살림을 갖고 밥해 먹다 보니 엄마 마음을 알게 되었다. 재료를 사느라 돈을 쓰고 개수대에 서서 씻고 털고 자르고 양념하고 조리하고 나면 아무렇지 않게 버릴 수 있는 게 없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맛있다. 아침 먹으며 점심때 먹을 걸 떠올리고 점심 먹으며 저녁에 할 요리를 생각한다. 남편도 나도 요리를 좋아해서 삼시 세끼 집에서 해 먹어도 크게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매 끼니 꼬박꼬박 챙기고 너무 잘 차려 먹다 보니 문제도 생긴다. 나이가 들며 활동량이 준 건 생각 않고 예전에 먹던 만큼 먹고 싶어 안달하며 설탕을 탐하고 밤늦게까지 주전부리한다. 욕심내어 급하게 먹다 보니 소화 불량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몇 주씩 고생한다. 그러면 손바닥으로 배를 쓸며 남편의 말을 되새긴다. 몇 해 전 밥상에서 나에게 한 말이다.


“당신은 먹는 소리가 너무 커.”


짜증이 섞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냉정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그냥 평소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던 나는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먹으면서 소리를 안 내? 당신은 어떻게 먹길래?”  

“글쎄. 입을 최대한 벌리지 않고 먹나? 어렸을 때 음식물이 보이게 먹거나 먹는 소리가 크면 혼났어. 예의에 어긋난다고.”


남편은 식사하며 말을 거의 안 한다. 조용한 식탁이 처음에는 어색했다. 밥맛이 아무리 좋아도 남편은 식사 중에 어떻다 평하기보다, 식사 끝에 맛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밥상 교육을 받고 자랐다. 턱을 괴거나 팔꿈치를 식탁에 올리고 깨작대서, 또는 밥풀을 남긴다고 혼났다. 입안에 음식물을 넣고 말하면 안 된다는 말도 많이 들었을 테다. 하지만 밥 먹는 소리가 어떻다고 혼난 적은 없던 것 같다. 냉면은 호로록 얼음은 오도독 상추는 아삭아삭 강냉이는 와그작와그작 오징어는 질겅질겅 쌈밥은 우적우적 된장찌개는 후후 불어 쩝쩝해야 맛있는 건데. 한국말을 모르는 남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난 맛있게 먹는 소리를 내는 게 밥상 분위기를 살린다고 생각하나 봐. 그래도 당신이 신경 쓰인다니까 조심할게.”라고 말할 수밖에.


그리고 얼마 뒤 서울 가족들과의 식사 때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평생 함께 밥을 먹었던 친정 가족들과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입 말고 귀를 열었다. 그러자 그동안 전혀 깨닫지 못했던 세계가 열렸다. 조카 손에서 놀아나는 젓가락은 짤각짤각 형부의 입으로 들어가는 숟가락은 우적우적 나물 좋아하는 엄마 입은 질겅질겅 아빠가 쥔 쇠 밥주걱은 누룽지를 긁느라 박박 댔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오가는 손들은 재빨랐고, 밥그릇과 반찬 접시를 오가는 동작들은 큼직했다. 밥보다 대화에 관심 많은 언니들은 재잘거렸고 장난이 먼저인 조카들은 짹짹댔다. 그러다 튀어나온 밥풀은 집어서 입속에 쪽 다시 넣으면 그만. 여기저기에서 따닥따닥 밥그릇 긁는 소리가 들리고 설거지통이 달그락달그락 차오르자 대가족 식사가 끝났다. 그날 밤 나는 십여 중창 불협화음을 겪고도 나와 결혼한 사람이 남편이란 걸 깨달았다.


김치김밥과 김치말이국수. 밥상에 김치 마를 일이 없어 이런 호강도 누린다.


남편은 후루룩 짭짭의 재밌고 맛난 느낌을 모를지라도 김치만은 어떻게 먹어야 제맛인지 안다. 세로로 길게 찢어서 입안에 쏙 넣고 손가락에 묻은 양념은 쪽쪽 빨기. 절인 배추와 양념을 섞다 보면 어느새 남편이 옆에 다가와 기다린다. 그럼 나는 엄마가 그랬듯이 붉은 윤기가 흐르는 양념을 배추 속잎에 얹고 남편 입속에 넣어준다. 엄마처럼 입을 쫑그리며. 그리곤 맛이 어떤 것 같냐고 물으면 남편의 대답은 한결같다. 음, 이 맛이야!


김치야 내가 만들지만 메주를 만들겠다고 팔 걷어붙이는 건 남편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고 어깨너머 본 적도 없이 책과 인터넷에 의지해 장을 담는다. 그러다 궁금해지는 게 있으면 나에게 묻는다. 한국말로 검색하면 정보야 흘러넘치지만 나는 그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는 정도다. 평생 메주는 못 만들어봤다는 엄마도 사위의 궁금증은 풀어줄 수가 없다. 시원찮은 대답에도 남편의 발효 실험은 꾸준히 이어진다. 메주에 푸른곰팡이가 돋으면 씻어 말리고 숯을 달궈 항아리를 소독해 장을 담고, 고추장은 물론 청국장과 막걸리도 주기적으로 담근다. 최근에는 만드는 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춘장을 상상에 기대어 조금 담고서 짜장 맛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


남편이 만든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만든 쌈장. 메주가 곱고 예쁘다는 건 직접 만드는 걸 보고서야 알았다.


그런 사위가 일 년에 한 번쯤 찾아오면 엄마는 푹 익힌 파김치나 갓김치 접시를 사위 앞에 밀어준다. “이런 김치는 안 먹어봤지?” 하며. 그러면 사위는 다소곳이 앉아서 주는 대로 잘 먹는다. 이역만리에 떨어져 사는 딸의 부엌에 된장과 고추장, 집간장이 떨어질 일 없게 해 주니 장모는 신통방통하면서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위를 바라본다.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항아리에서 된장과 고추장을 푸거나 원 없이 간장을 쓸 때면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 내 곁에 앉아서 독특한 냄새와 맛을 내는 발효 음식을 진심으로 즐기는 그를 보면 기쁨과 감사함이 밀려온다.


김치 팔아 큰돈 쥐진 못해도 밥상에서 김치가 빠지는 일은 없어졌다. 고슬고슬 지어진 현미밥에 상큼한 김치를 올려서 한입 먹고 그 감격을 나누고 싶어져 남편에게 말을 건다. “맛있으면 맛있다고 흥 나게 말해봐!” 그럼 남편은 “응, 맛있다.” 하고, 나는 “아니, 정말 정말 맛있다고 해야지.” 한다. 그러면 남편은 진지한 표정으로 “응, 진짜 맛있어.” 해준다. 그러곤 다시 별 대화 없이 음식 맛에 빠진다. 막 딴 김치 병에서 공기 방울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뽕뽕뽕 이어지고, 남편은 오물오물 고양이는 냠냠 나는 후루룩 짭짭 밥을 먹는다.




“칠십팔억 지구인 속에서 내 존재는 너무도 작지만, 나는 하루 세끼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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