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에서 겨울나기
12월 말일에 눈이 쏟아지듯이 온 뒤로 기온이 영하 십도 아래까지 떨어졌다. 뒷마당에 둔 옹기가 꽁꽁 얼어 뚜껑이 열리지 않는다. 나는 고추장과 된장을 집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고, 남편은 한국의 시베리아 고기압 영향에도 견디는 옹기들이라며 괜찮을 거라고 말한다. 장 담그는 건 남편 취미이고, 나는 아는 바가 없으니 그런가 보다 한다.
시월 말이면 뜰에 들어오는 콜로라도 강물이 끊긴다. 텃밭도 서서히 겨울잠을 준비하고 직거래장터도 문을 닫아 김치 장사가 한가해진다. 마침내 바깥일에서 벗어난 남편은 맥주와 장을 비롯한 다양한 발효 실험에 들어가고, 장작을 패거나 소소한 것을 고친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p.188.
남편은 한참 고민하다가 올 겨울에는 메주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이미 된장이 너무 많다.
몇 달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된장 몇 통을 가져갔다. 우리가 만들어 먹듯이 채소에 된장만 풀어 국을 끓였는데,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가 맛있게 드셨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키운 유기농 대두로 직접 메주를 띄우고, 캘리포니아 햇살에 익혔다가 콜로라도에서 담근 된장을 맛 본 부모님은 기특하고도 신기하게 생각하셨다. 된장의 역수입이랄까. 외국인 사위가 이국 땅에서 만든 된장 맛을 볼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항아리에서 된장과 고추장을 푸거나 원 없이 간장을 쓸 때면 남편에게 정말 고맙다. 김치야 내가 만들지만 메주를 만들겠다고 팔 걷어붙이는 건 남편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고 어깨너머 본 적도 없이 남편은 책과 인터넷에 의지해 장을 담는다. 그러다 궁금해지는 게 있으면 나에게 묻는다. 내가 인터넷에서 답을 얻지 못하면 엄마에게 여쭤보는데, 엄마도 평생 메주는 못 만들어봤다니 사위의 궁금증은 풀어줄 수가 없다. 시원찮은 대답에도 남편의 발효 실험은 꾸준히 이어진다.
남편은 메주를 띄울 때 작은 전기 매트를 깔아주고, 하루에 한두 번씩 어떤 색 곰팡이가 피었나 확인하며 속닥거린다. 메주에 푸른곰팡이가 돋으면 씻어 말리고 혹시 좋은 곰팡이가 더 잘 피지 않을까 기대하며 황국균을 뿌리기도 한다. 그러면 뭣도 모르는 내가 그건 일본식 발효제고 메주 만들 땐 아무것도 안 써도 괜찮다며 훈수를 두고, 남편은 볏짚이 없는데 그럼 어떡하냐고 대꾸한다. 그러건 말건 메주는 소란에 개의치 않고 잘만 익는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p.151.
한국 고추와 비슷하게 생긴 카옌 고추를 사서 햇볕에 말리고, 숯을 달궈 항아리를 소독하는 남편의 모습이 그럴싸하다. 남편은 된장과 고추장은 물론 청국장과 일본식 된장도 주기적으로 담근다. 최근에는 만드는 법이 잘 알려지지 않은 춘장을 상상에 기대어 조금 담고서 짜장 맛이 나길 기다리고 있다. 한국 주부들도 웬만하면 사 먹는 장을 미국인이, 그것도 이국땅에서 제대로 만들고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좋은 재료를 쓴다는 걸 알고 발효 뒷맛이 크게 이상하지 않으며 요리에 넣으면 제맛에 흡사하니 그걸로 족하다. 무엇보다 옆에서 구경만 하고도 온갖 장류가 생기니 나는 흐뭇할 수밖에 없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p.152.
식품 창고에는 된장과 고추장, 미소된장이 쌓여간다. 그런데도 남편은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또 고추장을 만들었다. 재료를 묵히면 안 되지, 하면서.
남편은 장모님이 물려주신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붉은 고추장을 휘젓는다. 나는 매년 이런 남편을 보면서 도움 하나 주지 않는다. 남편도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장 담그기는 자기가 즐기는 취미 생활이다. 나는 그저 감사하면서도 신기하고 재밌게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된장국을 먹으며 감격할 때마다 이걸 나눠먹을 가족과 친구가 가까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칠십팔억 지구인 속에서 내 존재는 너무도 작지만, 나는 하루 세끼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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