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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Feb 15. 2021

유비의 두 아들 (3)

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그해 겨울. 한때 형북 일대를 진동시키며 조조마저 두려워하게 했던 관우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상용에 주둔해 있던 유봉과 맹달에게도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관우로부터 수차례 요청(혹은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주로 병력을 보내지 않았거든요. 대외적으로는 아직 점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용을 함부로 비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고, 내부적으로는 두 사람이 서로 다투는 바람에 군사를 보낼 수 없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까닭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기록에 따르면 먼저 시비를 건 쪽이 유봉입니다. 맹달의 군악대를 빼앗았다고 하네요. 


  맹달은 아마도 잔뜩 화가 났을 겁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지원을 가지 않아서 결국 관우가 죽었고 형주마저 빼앗겼으니 말입니다. 조만간 자신에게 닥쳐올 유비의 분노를 깨달은 맹달은 냅다 위나라로 투항합니다. 그리고는 위나라의 병력과 함께 돌아와 오히려 상용을 공격하지요. 이때 맹달은 상당히 긴 편지를 보내서 유봉을 설득하려 했는데 그 구절이 자못 인상 깊습니다. 


  ‘그대와 한중왕은 (골육이 아니라) 길에서 만난 사이에 불과하오. (...) 유선을 태자로 삼은 이래로 식견 있는 자들은 모두 그대를 두려워하고 있소. (...) 한중왕은 이미 결단을 내린 후 그대를 의심하고 있소. (...) 모름지기 혼란과 재앙이란 후계자를 세우고 폐하는 일에서 비롯되는 법이오.’  


  맹달의 편지를 보면 당시 사람들이 유봉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속마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유봉은 이미 유선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맹달은 주장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 봤자 유비에게 제거당할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위나라에 항복하라고 말입니다. 


  유봉은 거부했습니다. 


  단지 맹달과 사이가 안 좋아서 그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여전히 양아버지 유비에 대한 충성심이나 혹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봉은 위나라 군사와 격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중과부적인 데다 내부의 배신까지 겹친 끝에 결국 패하고 성도로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유비는 극도로 분노한 상태였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유봉의 잘못은 너무나 컸습니다. 한 세력의 군주로서, 동료와 화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툰 끝에 요충지를 잃기에 이른 유봉을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관우의 의형으로서, 의동생의 죽음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기만 한 유봉의 행동을 도저히 보아 넘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유봉을 강하게 질책했습니다. 


  그러나 유봉은 자신이 무척 아끼는 양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비는 단지 전쟁에 지고 영토를 잃었다는 이유로 부하를 처단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조표와 다투다가 여포에게 서주를 통째로 내준 장비도, 적의 거짓말에 넘어가서 그대로 항복해 버린 학보도 아무런 질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유비에게 그럴 의지가 있었다면 유봉을 용서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반면 그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유봉은 죽은 목숨이었지요. 


  이 시점에서 유비가 가장 믿고 신뢰하는 신하인 제갈량이 진언했습니다. 유봉을 죽이라고 말입니다. 


  제갈량은 유봉이 강맹한 성격임을 근심했다. 유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끝내 제어할 수 없게 되리라 여겼기에 유비에게 그를 제거하라고 권했다. [촉서 유봉전] 


  유비는 제갈량의 조언을 받아들입니다. 유봉은 자결을 강요받았습니다. 이로써 유비의 후계구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삼 년 후 황제 유비가 붕어하자 태자 유선이 촉한의 차기 황제로 등극했습니다. 




  어쩌면 유선이 태어난 시점부터 이런 비극적인 결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봉을 후계자로 삼지 않는 한, 유봉은 유비의 후계자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유봉은 유능하기까지 했습니다. 차라리 무능한 인간이었다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냥 놓아두기에는 유봉의 공적이 너무 컸고 자질이 지나치게 우수했습니다. 


  유봉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릅니다. 후비의 후계자 지위를 원했는지, 아니면 아무 욕심도 없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상 아무려나 관계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봉이 무어라 주장하든 간에 다른 이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을 테니까요. 유봉의 존재 자체가 유선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습니다. 설령 유비가 유봉을 살려두었다 하더라도, 끝내 유봉은 유선에 의해 제거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유비 또한 그 사실을 알았겠지요. 그리고 제갈량도요. 


  유봉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걸 모를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유봉은 끝까지 유비를 믿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한탄했다고 합니다. 


  “맹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223년. 소열제 유비가 붕어한 후 제갈량은 상주하여 죽은 감씨를 황후로 추증합니다. 아울러 유비와 함께 합장하도록 하지요. 비록 죽은 후일망정 감씨가 비로소 본처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유선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정통성 논란마저 불식되었고 유선은 끝까지 자신을 따라다녔던 서자라는 꼬리표를 드디어 떼어냈습니다. 이러하여 촉한의 황위는 더할 나위 없이 공고해졌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유선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유비가 바라던 대로, 그리고 제갈량이 바라던 대로. 


  반면 조조와 손권은 달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장남과 차남이 요절했습니다. 그래서 삼남을 태자로 삼았지요. 정말이지 기묘한 우연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후계자를 정한 뒤에도 다른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까지 동일했습니다. 


  조조는 삼남 조비를 태자로 삼았음에도 끝까지 다섯째 조식을 사랑했습니다. 조조 사후에 조창이 군사를 이끌고 수도로 와서 조식을 충동질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조비는 아버지의 뒤를 잇자마자 조식의 힘을 제거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해야 했지요. 목숨만은 살려주었지만 단지 그뿐이었습니다. 조식은 일평생 떠돌아다니며 불우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손권에 비하면 조조도 양반입니다. 손권은 삼남 손화를 태자로 삼았음에도 사남 손패를 태자와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하며 노골적으로 손패를 총애했습니다. 그로 인해 오나라의 신하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나뉘어서 죽어라 치고받게 되었고, 끝내는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에 이르렀지요. 결국 손패는 손권에 의해 죽고 손화 또한 손권이 사망한 후 정적들에 의해 제거되어 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사례, 거기다 초반에 언급한 원소와 유표의 사례까지 보면 살아생전 자신의 후계 구도를 제대로 정리해 둔 사람이 전무한 수준입니다. 당대의 손꼽히는 군웅들 중 오직 유비만이 그 일을 해냈지요. 그래서 더더욱 유비가 대단한 인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던 양자에게 자결을 명령한 유비의 속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유비는 유봉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유봉의 잘못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을까요? 자신이 건국한 나라가 존속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봉을 죽여야만 한다는 현실이 슬펐을까요? 유봉을 양자로 들였던 잘못된 결정에 대한 후회의 눈물이었을까요? 대체 어디에서부터 이 모든 문제가 시작된 것이었을까요. 애당초 유비가 평범한 필부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더라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어쩌면 수십 년 전, 유비가 적수공권으로 몸을 일으키며 감히 천하를 꿈꾸던 그 순간부터 이러한 부류의 비극이 운명지어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만 여담을 하나 늘어놓겠습니다. 제갈량은 결혼한 후에도 오래도록 후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포기한 후 동오의 형 제갈근에게 부탁하여 그의 차남 제갈교를 자신의 양자로 들이지요. 마치 유비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헌데 놀랍게도 제갈량의 나이 마흔일곱 살 때 드디어 친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유비가 유선을 보았을 때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후사는 누가 잇게 되었을까요. 나이가 스무 살 이상이나 많은 양자였을까요, 아니면 비록 젖먹이에 지나지 않지만 친아들이었을까요. 자신이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과거 유봉을 제거하라고 권했던 제갈량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러나 제갈량은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갈량의 양자인 제갈교는 불과 스물다섯 살에 요절하고 맙니다. 제갈첨이 태어난 이듬해의 일이었지요. 이로써 제갈량의 후사를 누가 잇는지는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눈을 감자 당시 여덟 살이었던 제갈첨이 아버지의 작위인 무향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저 여담일 뿐입니다만. 


  (물론 제갈량이 스스로 양자를 제거했다는 얼빠진 주장을 하려는 의도는 일절 없습니다. 그저 세상사라는 게 참 신기하고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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