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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Feb 12. 2021

유비의 두 아들 (1)

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한때 천하에서 가장 강성했던 군웅인 원소는 적장자인 원담 대신 막내아들 원상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미처 후계구도를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고 그 자식들은 사분오열하여 서로 다툰 끝에 결국 아버지가 일구었던 업적을 죄다 조조에게 내주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원소의 가장 큰 잘못으로 후계구도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점을 지적합니다. 


  비록 원소만큼 강성하지는 못했지만, 형주를 차지하고 앉아 절반쯤은 천자 노릇까지 하던 야심가 유표 또한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큰아들 유기 대신 작은아들 유종을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유종은 아버지의 시신이 미처 식기도 전에 조조에게 냅다 항복함으로써 유표의 기업을 송두리째 가져다 바쳤습니다. 


  심지어 그 조조조차도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는 머뭇거리며 오래도록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장남 조앙과 차남 조삭이 일찍 죽고, 남은 자식들 중 적장자는 조비였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다섯째 조식을 총애하여 그에게 후사를 물려줄 생각을 품고 있었지요. 결국 217년, 조조는 자신의 나이가 예순셋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적장자 조비를 후계자로 지목합니다. 그러나 이후로도 끝내 조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요. 오죽했으면 가후처럼 지혜로운 이가 조조더러 원소나 유표 꼴이 되고 싶냐고 에둘러 말할 정도였습니다. 

  ( 참고자료 : 09화 조조의 세 아들 (1) (brunch.co.kr) )


  결과적으로 볼 때 조조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습니다. 적어도 누가 후계자인지는 확실하게 결정을 내려 주었기에 원소처럼 자식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 반면교사가 바로 손권입니다. 조조 사후 수십 년이 흐른 뒤, 손권은 늘그막에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끝에 결국 두 아들뿐만 아니라 무수한 신하들까지 죄다 죽게 만든 희대의 삽질인 이궁의 변을 일으킴으로서 자신의 인생 최대의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당시 군웅들의 후계자 문제는 매우 중요했으며 때로는 그 사람이 일평생 이룩한 모든 업적을 단번에 무위로 돌려 버릴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후계자 문제가 단순히 어느 자식을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가 하는 감정적인 이유에서만 비롯된 건 아니었습니다. 소설인 삼국지연의를 보면 마치 원소나 유표 모두 후처(後妻)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아무런 죄 없는 장남을 내치고 대신 막내를 후계자로 삼은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후계자란 단순히 개인적인 호불호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원담은 몇 차례 실수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여 원소를 실망시킨 바 있었고, 유표의 경우 형주의 가장 유력한 호족인 채씨 집안이 유종을 밀었기에 그걸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었지요. 원소나 유표가 단지 노망이 들어서 무작정 막내만 예뻐한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자. 그러면 유비의 상황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훗날 후주(後主)로 일컬어지게 되는 유선은 207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알다시피 유비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선이 금수저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위치는 꽤나 애매모호하고도 불안정했습니다. 당시 유비는 기반을 모두 잃고 형주의 객장으로 더부살이하는 신세에 불과했고, 유선의 어머니인 감씨는 정식으로 맞아들인 처(妻)가 아니라 첩(妾)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유선이 서자(庶子)였다는 뜻입니다. 


  유비는 천하를 떠돌아다니면서 몇 차례나 혼인을 거듭했습니다. 그만큼 처자를 자주 잃기도 했지요.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헤아려 보아도 여러 번입니다. 서주에서 여포에게 배신당하면서 처자가 사로잡혔고, 이후 여포와 화해했다가 다시 사이가 나빠지면서 공격을 받아 다시 한 번 처자를 잃었습니다. 조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서주를 탈환했다가 재차 공격을 받아 도망쳐야 했을 때도 처자가 관우와 함께 포로로 사로잡혔습니다. 그런 고난을 겪다 보니 촉서 감황후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선주는 적실(嫡室. 본처)이 여러 차례 사망했기 때문에 항상 (감황후가) 집안일을 다스렸다. [촉서 감황후전]


  본처들이 여러 번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본처 노릇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감씨는 엄연히 첩이었고, 당시 시대상에서 처와 첩의 구분은 명확했습니다. 그렇기에 서자인 유선이 유비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보장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유비에게는 유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양아들까지 있었습니다.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대략 201년에서 206년 사이쯤에 유비는 양자를 입양했습니다. 본래 성은 구(寇)씨였다고 하며 외가 쪽으로 유씨의 피를 이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그렇게 정식으로 입양한 양자의 이름은 유봉이었습니다. 


  당시 유비는 이미 마흔을 훌쩍 넘겼음에도 후사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이 거의 살인보다도 더 큰 잘못으로 간주되던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면 양자를 들이는 행위 자체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비교적 나이가 많은 아이를 골랐다는 점으로 보아 자신에게 혹시 모를 불상사가 생기는 경우에도 대비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물론 유봉의 능력도 꽤나 뛰어났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재 보는 안목은 최상급이었던 유비가 자신의 양아들로 삼은 인물입니다. 무능할 리 없죠. 


  그런데 207년, 유비의 나이 마흔 일곱에 감씨가 친아들 유선을 낳으면서 모든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유선은 첩의 아들입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서자지요. 반면 유봉은 적자(嫡子)로 간주할 수 있는 양자입니다. 비록 친아들은 아니지만 유비가 유봉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리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유비의 후계 구도는 당사자인 유비 자신의 의향에 달려 있었습니다. 


  유비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아무래도 피가 섞이지 않은 양자보다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친아들에게 더 마음이 쏠렸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 속마음을 지금 추측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도 유비는 한동안 어느 한쪽을 후계자로 점찍는 대신 비교적 공정하게 대우해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비에게는 기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애당초 후계구도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법도 합니다. 어쨌거나 물려받을 게 있어야 싸우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가 땡전 한 푼 없는 거지나 다름없는데 자식들끼리 유산 다툼을 할 이유가 무어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듬해인 208년, 유표는 죽고 조조가 형주를 공격해 옵니다. 유비는 장판에서 크게 패하여 또다시 가족마저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이때 하나뿐인 친아들 유선마저 잃을 뻔 했습니다만 조운이 어린 유선을 품에 안고 그 어머니 감씨를 호위하면서 가까스로 위험을 피했습니다. 언제 태어났는지, 누구의 소생인지조차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두 딸은 결국 조조의 조카 조순에게 사로잡히는 비극을 겪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유선의 고난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제 시작인 수준이었습니다. 


  적벽대전 이후로 다시 유비에게도 나름의 기반이 생겼습니다. 유비는 지극히 정치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인 이유로 자신보다 스무 살 이상이나 어린 손씨를 본처로 맞아들입니다. 동맹이자 호적수인 손권의 동생이었죠. 이로서 유비의 후계 구도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 버렸습니다. 만일 손씨가 아들을 낳는다면 유비의 후계는 무조건 그 아들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본처가 낳은 적장자이니 말입니다. 물론 유봉이 정식으로 들인 양자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를 후계자로 밀수도 있겠지만, 손씨가 낳을 아들의 뒷배가 손권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유비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습니다. 더군다나 고작해야 서자에 지나지 않는 유선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손씨가 아들을 낳는 순간 유봉과 유선은 모두 끈 떨어진 두레박 꼴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손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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