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Nov 09. 2021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7)

2009-2014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이 신해철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을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전후로 신해철 개인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지나치게 많았다. N.EX.T는 대체 몇 번째일지도 모를 해체를 또다시 반복했고,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져야 했으며, 의욕적으로 시작한 사업은 말 그대로 망했고, 학원 광고 출연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였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이명박 정부 하의 국정원에서 관리하던 이른바 ‘좌파 연애인 블랙리스트’에 올라 유무형의 압력을 받은 바 있으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십여 년간 진행해 오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마저 종영을 맞이했다. 


그 모든 일들이 뒤섞이면서 신해철은 어느덧 대중음악계의 주류에서 완전하게 배제된 지 오래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한때 영웅이 되고 싶어하던 소년은 이제 그 자신이 노래하던 것처럼 힘없이 몰락한 수컷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종말은 아니었다. 2012년, 신해철은 노무현을 추모하는 노래를 세상에 내놓는다. 


꽃은 지고 달은 기울어 가네
아무런 인사도 남기지 않고
날은 가고 맘은 아물어 가네
산 사람 살아야 하는 거겠지
(...)
우린 끝까지 살겠소
죽어도 살겠소
살아서 그 모든 걸 보겠소

-신해철, [Goodbye Mr.Trouble]


제목의 ‘Mr.Trouble’은 물론 노무현을 지칭하는 애증 섞인 별명이었지만, 동시에 전락한 사고뭉치로 간주되던 당시 신해철 자신의 투영이기도 하다. 이 노랫말을 통해 그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을 드러내면서도 담담하게 말한다. 끝까지 살겠노라고. 죽어도 살겠노라고. 살아서 그 모든 것들을 보겠노라고. 


그는 세계와 맞서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2014년. 다년간의 절치부심 끝에 무려 6년 만에 신해철의 새로운 앨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작 4곡뿐이라는 구성은 과거처럼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중음악시장이 완결된 앨범에서 개별곡 위주의 소비로 변한 지 오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고 변명할 여지는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앨범에 실린 노래였다. 본래 아내를 위한 노래였지만 최종적으로는 세상의 모두를 향한 노래로 완성된 [단 하나의 약속]은, 신해철이 실로 오랜만에 세상에 내놓은 자랑스러운 걸작이었다. 


하나만 약속해줘 어기지 말아줘
다신 제발 아프지 말아요
내 소중한 사람아
그것만은 대신 해 줄 수도 없어
아프지 말아요
그거면 돼 난 너만 있으면 돼

-신해철, [단 하나의 약속]


아프지 말라는 부탁은 암으로 투병했던 아내를 위한 당부이자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소망이었다. 또 오랫동안 몸과 마음이 모두 엉망진창이 된 신해철 자신을 위한 위로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속해서 그를 사랑해 온 팬들을 위한 감사의 고백이자 선물이었다. 이 노랫말을 통해 신해철은 마침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인(成人)이, 완성된(成) 사람이(人) 되었다. 그는 다시금 담담하게 말했다. 한때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신은 믿고 있다고.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그 모든 단어들을. 


I still believe in these words forever
Promise, Devotion, Destiny, Eternity, and Love
It's you

-신해철, [단 하나의 약속]


하지만 앨범을 내고 불과 넉 달 후, 신해철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마흔일곱. 너무나도 어이없이 일어난 의료사고의 황망한 결과였다.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 그가 생전에 만들던 노래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제 수능을 친 후 대학생이 되어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조카를 격려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비화를 지닌 이 노래는, 소년과 어른의 기로에서 오래도록 고군분투하던 신해철이 마침내 어른이 되어 과거의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눈물은 거짓이 없어
땅에 뿌려진 만큼
너를 자라나게 할 테니

-신해철, [Welcome To The Real World]


그가 겪어온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늘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를 선도하던 시절에서 어둡고 절망적인 땅 속 세계까지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신해철은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어른들은 흔히 말하곤 한다. 사회는, 세상은, 너희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고 고달프다고. 신해철이 겪어온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계는 소년을 냉혹하게 짓누르고 그가 가진 희망과 꿈을 빼앗으려 했다. 소년은 몇 차례나 쓰러져 좌절하고 방황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끝내 다시 한 번 일어나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답답해하지 말라고. 


고독은 한 해 또 한 해 지날수록 더욱 힘들고

세상은 너를 길들이려 하기에

언젠가는 지쳐 쓰러질지도 모르고

때로는 자신을 깎고 자르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흐느껴 울어야 하지만


바보처럼 운명이라는 말을 믿으면서 

지나간 세월에 후회는 없도록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걸어간다면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등불을 들고 여기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새로운 세계로, 진짜 세계로

어서 오라고. 


넌 
아직 넌 
이제 시작이야
너만의 세상이 시작되는 거야
그토록 원하던 어른이 되는 거야
모든 질문과 대답이 있는 거야
두려워하지 마 답답해하지 마
Welcome To The Real World

-신해철, [Welcome To The Real World]


이것이 신해철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였다. 

신해철에게서, 소년들에게. 

이전 06화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