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Feb 25. 2022

달빛요정, 요정은 간다 (1)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대한민국 문화계는 뒤늦은 변혁을 겪고 있었다. 그 시대를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개인화’라는 화두가 문화계의 여러 분야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대중문학에서 그러한 경향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거대담론과 대하장편소설로 대변되던 기존 소설들의 시체들뿐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거대한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개개인을 둘러싼 세상이 너무나도 팍팍하고 험난했으며 때로는 무서웠다. 바야흐로 시대는 ‘나’, ‘나의 내면’, 그리고 ‘나를 둘러싼 작고 좁은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IMF 사태가 터졌던 바로 그 해에 신해철은 오케스트라를 통째로 때려 박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크고 아름다운 음악을 내놓았지만, 그러한 시도는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새로운 세기의 초입으로 들어선 2003년. 인디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첫 번째 앨범 <Infield Fly>가 조용히 세상에 나왔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통칭 달빛요정이라고 불리는 이 밴드는 사실 이진원 한 사람으로 구성된 원 맨 밴드다. 이 자칭 ‘키 작고 배 나온 아저씨’는 처음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인디밴드라는 특성을 감안하자면 그 전략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현실의 반영이었을 뿐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추측된다.  


  그의 노래는 이른바 낙오자의 정서를 관통한다. 노래로 한 달에 백만 원을 번다는 소박한 목표마저도 달성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과, 작곡을 위해 골방에서 기타를 두드리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주위의 구박을 받아야 하는 우울한 현실이 노래의 마디마다마다 농도 짙게 스며들어 있다. 때때로 힘을 내기 위해 스스로를 격려해 보기도 하지만, 그런 노래들마저도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아니라 그저 흐릿하게 빛을 내뿜는 누런 백열등에 불과하다. 그가 남긴 노랫말들에는 항상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언제나 그 존재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달빛요정. 빛나는 꿈과 희망이 아니라, 어두운 현실의 우울함을 노래하던 가수. 


  달빛요정의 노래를 들으면서 간혹 자책감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다. 버겁고 험난한 현실을 가까스로 떠안으면서 살아온 그의 노래를, 나는 단지 가벼운 여흥거리로서 소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가끔씩 고개를 들곤 한다. 그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 후부터는 그런 심정이 더욱 잦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그의 노래를 듣는 것은 결국 그가 그만큼 훌륭한 가수였기 때문이다.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심정을 담담하게, 때로는 절실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담아낸 그의 노래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세상에 달빛요정이라는 이름 넉 자를 남기고 있다. 


  이 글은 세상을 떠난 이진원에 대한 나의 추모다. 

이전 07화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