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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r 25. 2024

시트러스 - 상큼하고 발랄한 백합

백합만화 읽기 04


[시트러스 / 사부로우타 / 레진코믹스 / 전 10권(완결) / 권당 5000원(전자책)]


"넌 날 필요로 해줄 거야?"




부모님의 재혼으로 인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매가 되어버린 아이하라 유즈와 아이하라 메이. 솔직하고 거침없는 날라리이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지는 유즈와, 남들 보기에는 완벽한 우등생이자 모범적인 학생회장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현실의 벽에 짓눌리고 있는 메이 두 사람이 편견과 방해를 뛰어넘어 맺어지는 이야기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이 표지에서부터 드러나는 아름다운 그림체다. 덕분에 이 작품을 처음 펴 보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고비가 바로 첫 권이기도 하다. 시대를 거슬러 오른 것만 같은 1990년대 초반 소년만화식 낯뜨거움이 느껴지는 연출이라든지, 중간 과정 따윈 집어치우고 일단 키스부터 하고 나면 서로 사랑하게 될 거라는 투의 정신 나간 편의주의적 전개가 여러 모로 부담스럽다


하지만 첫 권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그때부터는 순풍에 돛 단 듯 이야기가 진행된다. 유즈와 메이를 비롯하여 주변인물들의 캐릭터가 제대로 정립되고, 지나치게 빨랐던 전개가 제 속도를 찾음에 따라 감정선 또한 비교적 자연스러워진다. 그러면 남은 것은 두 사람의 알콩달콩한 관계를 감상하는 것뿐. 




사실 이 작품에는 단점이 많다. 연출은 구식이고 전개는 설득력이 없다. 등장인물들의 역할도 상투적이다. 그러나 보는 시선다소 바꿔보자. 작품은 사실 일반적인 백합만화의 관점에서 접근하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년만화의 문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만화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비로소 이 작품의 장점이 눈에 들어온다. 일견 납득이 가지 않는 전개는 실상 우정과 노력으로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소년만화의 장르적 특성을 그대로 본딴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신념을 우직하게 밀어붙여 마침내 고난을 이겨낸다. 주변 인물들의 상당수는 처음에는 적으로 등장했다가 이후 감화되어 주인공의 동료가 된다. 이는 드래곤볼의 피콜로와 베지터에서부터 유래된 유서 깊은 전통이다. 


이런 큰 틀 위에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 덧씌워진다. 아름다운 그림체는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며 장점이다. 컷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인 티가 역력하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서 작품의 서사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나아가 작품 전체의 질을 끌어올린다. 이렇게 예쁜 여자에게 반한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싶은 심정이랄까.  


인물의 설정은 무척이나 작위적이지만 그러면서도 존재감이 있다. 예컨대 주인공 중 하나인 메이를 보자. 백합 만화계에서 여고 학생회장이라는 존재는 아예 정형화된 클리셰에 가깝다. 고고하고 똑부러진 우등생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만, 그 내면은 약하디약하기에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어하는 외강내유형 캐릭터다. 그러나 이런 클리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애당초 클리셰란 대중의 보편적인 호응을 받기 때문에 클리셰가 된 것 아니던가. 그렇기에 클리셰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지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메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두 차례 묻는다. 자신을 필요로 해줄 것이냐고. 그 질문의 함의는 타인과의 관계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데 있다. 누군가는 답한다. 물론이라고. 하지만 유즈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한다. 자신은 메이를 전혀 모르겠다고. 


여기에 이 작품 전체를 꿰뚫는 본질이 담겨 있다. 유즈가 원하는 것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날 사람이 아니다. 그럴 듯한 이유나 논리 따위도 필요치 않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렇기에 유즈는 메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메이라는 사람 자체를 원할 뿐이다. 신해철처럼 '필요로 만나고 생활을 위해 살기는 싫다'고 외치고, 존 레논처럼 '네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랑 뿐'이라고 선언하는 인물이 바로 유즈다. 


낯뜨겁다고? 당연한 소릴.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소년만화니까. 그리고 좋든 싫든 간에 우리들 중 절반은 한때 소년이었다. 




시트러스는 분명 완벽한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뛰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시트러스(citrus)라는 제목 그대로 다소 풋풋하면서도 상큼하고 발랄한 향이 느껴진다. 


특히나 이 작품의 후속작인 [시트러스+]에서는 본작의 단점들이 상당히 보완되었다. 주인공 두 사람의 해피엔딩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에 주변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그들 간의 관계를 그려가는 모습이 본편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렇게 단점이 줄어든 만큼 장점이 더 빛나게 된 수작이다. 본편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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