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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Apr 01. 2024

저 아이에게 키스와 흰 백합꽃을 - 뭔가 삐뚤어진 백합

백합만화 읽기 05


[저 아이에게 키스와 흰 백합꽃을 / 칸노 / 넥스큐브 / 전 10권(완결) / 권당 2500~3000원(전자책)]


"너 같은 건, 조금 요령이 좋은 보통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주겠어."




'완벽'해지기 위한 지독한 노력으로 학업우수 우등생이자 품행방정 모범생이 된 시라미네 아야카.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고등학교에 와서 마침내 벽을 만나고 만다. 그를 가로막은 자는 오로지 타고난 재능만으로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는 천재, 쿠로사와 유리네. 2등이 되어버린 시라미네는 한층 더 노력에 박차를 가하지만 도저히 쿠로사와를 뛰어넘을 수 없어 좌절감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미네는 선언한다. 자신이 1등이 됨으로써 쿠로사와가 '보통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주겠다고. 그리고 자신을 '천재'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인식하려는 이를 처음 만나게 된 쿠로사와는 그런 시라미네에게 끌리게 된다. 




동등한 입장에 선다는 건 수많은 백합 만화에서 무수하게 변주되는 테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건 신념의 영역이거나 혹은 정치적 구호일 뿐, 현실과는 다르다. 나이의 고저에서부터 직장에서의 지위나 빈부의 격차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모든 영역에서 상하가 만들어지고 우열이 생겨난다.  


현실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연애에서 우리는 상대의 성격을 따지고 외모를 따지고 나이를 따진다. 도달점인 결혼까지 가면 고려할 것이 더 많아진다. 상대의 연봉을 따지고 재산을 따지고 가족을 따지고 고향을 따진다. 그토록 많은 기준점들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이 동등한 입장에 서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자를 갈망한다. 그 모든 조건과 배경을 걷어치운 후에야 비로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진정으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은 법. 서로가 동등하게 설 수 있는 출발선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관계맺음의 첫 걸음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자신을 이김으로써 자신을 평범한 존재로 만들어 달라는 쿠로사와의 요구는 그의 일평생에 있어 첫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점이다. 




이 작품은 흔히 말하는 군상극에 해당된다. 시로가네와 쿠로사와 두 사람의 관계를 주축으로 큰 줄거리를 전개해 가면서도 중간중간 방향을 틀어 주변의 인물들이 주역이 되는 단행본 반권 내외의 이야기들을 그려간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뭔가 묘한 곳에서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예컨대 체육부 커플은 서로를 자유롭게 해 주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 구속되기를 바란다. 공보부 커플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도 알려주지는 않는다. 코스프레 커플은 상대를 바꾸려 하면서도 자신은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다. 독서부는 집착에 가까운 독점욕을 드러내면서도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개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원예부 커플이다. 좋아하기에 배신하고, 사랑하기에 소중해하는 것을 부숴 버린다. 다들 어딘가 삐뚤어지고 뒤틀려 있다. 비록 작품의 특성상 모든 이들이 끝내는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여로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불안정함과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다.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르기에 크고 작은 충돌이 생겨난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곧 극복의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들은 대체로 그러한 점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아한다. 그건 무척이나 힘들고, 불편한 일이니까. 하지만 언급하지 않는다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분명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극한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사랑에 뒤따르는 불편한 이면까지 숨김없이 그려낸 이 작품에 가치가 있다. 




다만 작품 외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스캔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페이지의 좌우가 조금씩 잘려나간 게 눈에 띈다. 특히 양면을 쓰는 장면이 많은데 그 때마다 중간 부분이 투박하게 잘려나가는 것이 신경 쓰인다. 게다가 몇몇 권에서는 스캔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뒷면이 비쳐 보이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그런 문제들이 작품 자체의 가치까지 훼손하지는 않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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