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Mar 18. 2024

금손 여고생과 OL 부녀자 - 초지일관 오덕들의 백합

백합만화 읽기 03


[금손 여고생과 OL 부녀자 / 사토 / 프레지에 / 전 5권(완결) / 권당 3500원(전자책)]


"당신을 알게 된 건 행운이야."




올해로 스물여섯 살이지만 여전히 뼛속까지 부녀자인 아이자와 카오리(닉네임 '아이')와 열여섯 여고생인데도 금손 동인 만화가로 이름난 스미타 카스미(닉네임 '미스미')의 연애 이야기. 하지만 그 실상은 흔히 말하는 오덕 십덕 동인녀 두 사람이 각자 창작자와 소비자로서 만나며 겪어가는 이야기다. 


BL 덕질이 유일무이한 삶의 목적이자 존재 의미인 아이. 그는 얼굴도 실명도 모르는 인터넷 세계 너머의 금손 작가 미스미를 동경한다. 이유는 덕질의 대상으로 제대로 꽂혀버린 애니메이션의 팬픽을 그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미스미의 팬픽이 올라올 때마다 중언부언 장문의 댓글로 찬사를 바치는 행위가 아이의 삶에서는 매우 크고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미스미는 미성년자인 여고생. 그 외에도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르다. 무엇보다도 미스미는 창작자고 아이는 소비자다. 그 점은 작품 내내 일관되게 강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아이는 자신과 미스미를 동격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미스미는 '신'적인 존재이며, 자신은 한낱 '길가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미스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같다고. 그저 똑같이 애니메이션의 늪에 빠져 행복해하고 있는 말기 환자들일 뿐이라고. 따라서 두 사람이 사귀는 건 곧 동등한 위치에 선다는 뜻이기도 하다.  


굳이 동인 만화에만 한정지을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 콘텐츠란 필연적으로 소비자가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다. 독자 없는 만화는 낙서이고, 관객 없는 영화는 돈과 필름의 낭비이며, 청자 없는 노래는 소음이다. 그렇기에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쌍방향으로 작동한다. 그게 곧 창작자와 소비자가 동격이라는 말의 의미다. 


오덕들이란 무언가를 꽤나 심하게 좋아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마이너리티에 해당되고, 따라서 배타적이다. 하지만 오해하지는 말자. 오덕들이 의도적으로 배타성을 선택한 건 아니다. 그저 소수자이기에 결과적으로 그리 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오덕들은 항상 바란다.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공감해 주고 함께 좋아해 줄 다른 누군가를. 


그렇기에 당신을 알게 된 건 행운이라고 말해주는 이 작품의 가치가 더욱 빛난다. 내가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뿐만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좋아하는 것을 향해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 이는 모든 오덕들의 꿈이자 빛이며 희망이 아닐까.  




부가적인 소득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코미케와 코미티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동인 만화 업계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아울러 번역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국내 만화책 업계에서 전자책이 일상화되면서, 다양한 작품들이 번역되는 건 긍정적이지만 그만큼 번역의 질이 떨어지는 느낌도 강하다. 하지만 본 작품의 번역은 최상급이라 할만 하다. 동인 업계를 다룬 작품의 특성상 이른바 업계 용어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적절하게 번역 또는 번안되어 있다. '뻐렁치다'를 활용한 센스는 감탄스러울 정도. 심지어 주인공 아이의 주절주절, 지리멸렬, 요령부득 말투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다만 마지막 권에서 이름이 갑자기 카스미->스미카를 왔다갔다하는 부분은 아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