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만화 읽기 01
[이지러진 달과 도넛 / 우스이 시오 / S코믹스 / 전 4권(완결) / 권당 3500원(전자책)]
"나는 간단한 일을, 스스로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인지도 몰라."
평범한 직장인인 우노 히나코는 젊고 화려한 직장인이다. 그러나 그 본질은 타인과의 관계맺음에 서투르기 짝이 없는 소심한 사람일 뿐. 회사 동료들의 식사 권유조차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점심을 따로 먹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아침부터 고민에 빠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떠밀려 소개팅에 나가지만 항상 요령부득이다. 남에게 상처를 입힐 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자책감에 빠져드는 모습은 흡사 우울증 초기에 가까울 정도다.
한편 같은 회사 동료이자 그녀보다 다섯 살 연상인 사토 아사히는 업무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똑부러진 미녀. 하지만 고독한 늑대 같은 분위기에 쉽사리 말을 붙이기 힘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실상은 어설픈 외톨이에 지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고아가 된 이후로 오직 여동생만을 위해 살아왔던 탓에, 타인과의 관계가 부족하다 못해 아예 전무하다시피하고 친구라고는 단 한 사람뿐일 정도다.
이 둘을 중심으로 아사히의 동생 스바루와 아사히의 유일무이한 친구 후카까지 도합 네 명의 관계가 엮이는 차분하고 고요한 백합 만화.
알에서 태어나고자 하는 새는 먼저 알껍질을 부수고 나와야 한다. 관계맺음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재구축한다. 그렇기에 관계맺음에는 반드시 자아의 파괴가 선행된다. 새가 껍질을 부순 후에야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자기자신의 완결성을 무너뜨린 후에야 타인과 접촉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마냥 상냥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몹시 고통스럽고 불쾌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란 곧 타인을 나에 맞춰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마치 서로 마주본 채 번갈아 가면서 상대의 얼굴을 후려치는 아일랜드 식 권투처럼, 타인과의 관계맺음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이다.
주인공인 히나코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 있어 타인과의 관계는 고통의 연속이다.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그럴 듯한 모습에 집착하고, 타인에게 다가서려는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타인의 관심과 이해를 갈구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복잡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부드럽게 전개된다. 작중 등장하는 주연과 조연 네 사람이 모두 호의와 선량함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언행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치유된다. 불필요한 주변 인물은 등장하지 않고 분량 늘이기식 갈등도 없다. 독자에 따라서는 히나코의 성격 때문에 삶은 고구마를 물 없이 씹어먹는 갑갑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그런 부분이 확연하게 줄어들면서 내적 성장이 느껴지는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기도 하다.
가늘고 여린 그림체는 상당히 미려하면서도 작품의 분위기와 어우러진다. 다만 흡사한 표정과 같은 구도가 지나치게 반복되는 느낌은 꽤나 아쉽다.
백합 만화의 스팩트럼은 꽤나 넓다. 작가에 따라 조망하고 싶어하는 부분도 확연히 다르다. 소수자로서의 괴로움과 고통에 집중하는 작품도 있고, 여러 사람 사이의 관계성과 감정선을 조명하는 작품도 있다. 때로는 노골적인 성욕과 육체 관계를 테마로 삼기도 한다. 그 드넓은 범주 중에서도 특히 등장 인물의 자아 찾기와 관계맺음이라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백합 만화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이지러진 달과 도넛]은 가장 권하고 싶은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