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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Apr 08. 2024

쏙독새, 맴돌다 - 변명 없는 불륜의 백합

백합만화 읽기 06

[쏙독새, 맴돌다 / 야시오 고요우 / AK커뮤니케이션즈 / 단권 / 3500원(전자책)]


"어차피 우린 이대로 가 봤자 아무 것도 안 되잖아."




학창 시절 한때 연인으로 지냈던 유카코와 치나미. 하지만 유카코는 더 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둘 사이의 관계를 청산한다. 그로부터 10년 후.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에서 우연히 치나미를 만난 유카코는 예전 그대로 그에게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가슴 안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애정이 다시금 불타오르면서 유카코는 치나미와 급격히 가까워지고, 마침내 잠자리를 함께 하기에 이른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 그건 유카코가 이미 결혼해서 남편이 있는 유부녀라는 것. 


그렇다. 이 작품은 불륜을 다룬 백합이다. 




창작물에 있어 불륜은 매력적인 소재다. 금기를 깨는 데서 비롯되는 배덕감은 작품 전체에 긴장감을 준다. 누군가는 반드시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에서 등장 인물의 감정선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백합 만화에서 다루는 불륜은 대체로 성적 정체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고뇌는 두 배로 늘어난다. 약간 과장되게 말하자면, 불륜 백합은 피학성을 자극하는 장르다. 


그래서일까. 불륜은 기피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물론 창작물에서 불륜을 다루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TV의 불륜 막장 드라마 논쟁으로 떠들썩했던 때가 불과 십여 년 전이다. 불륜이 그만큼 민감한 소재이란 뜻이다. 더군다나 연애물의 주인공에 깊숙히 공감하는 성향의 독자들은 대체로 불륜 같은 부도덕한 설정을 기피한다. 불필요하게 죄책감을 강요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륜을 다룬 작품은 심리적 도피처를 마련해두곤 한다. 예컨대 주인공이 바람을 피우지만, 사실은 배우자가 먼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내가 나쁜 놈이지만, 상대가 나보다 더 나쁜 놈이라면, 나의 나쁨이 정당화되니까. 그게 말이 되나 싶지만 의외로 현실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호평하고 싶다. 이 작품은 주인공인 유카코를 위해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그가 일방적인 가해자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륜의 대상인 치나미를 향해서건, 아니면 지금의 남편인 아라타를 향해서건, 항상 먼저 상처를 주는 쪽은 유카코다. 치나미의 마음을 배신한 사람도 유카코고 다시 남편을 배신한 사람도 유카코다. 그렇기에 작품 내에서 캐릭터가 무너지지 않는다. 불륜을 다룬 수많은 만화들이 주인공의 선택에 억지로 정당성을 부여하느라 작품 전체가 붕괴되는 대참사를 겪을 때, 이 작품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우직하게 밀어붙인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다루려면 이 정도 근성은 있어야 한다. 


참고로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쏙독새(夜鷹)는 과거 일본에서 길거리의 하급 창부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이 작품의 또다른 매력은 일방적 피해자인 남편에 있다. 처음에는 무색 무취 무해한 주변인물, 아이 문제로 아내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흔해빠진 설정을 지닌 캐릭터로 보인다. 그러나 작품 후반부에 '부럽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그 대사가 은유하고 있는 이중적인 정체성의 문제와 맞물리면서 순식간에 인물의 생명력이 생생하게 생겨난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유카코가 아니라 남편이지 않은가 싶을 정도다.  


가해자인 유카코는 끝내 행복해졌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치나미도 결국 행복해졌다. 그렇다면 피해자인 남편 아라타는 행복해졌을까? 그 대답은 작품 내에서는 일절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라건대, 그러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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