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Apr 22. 2024

이윽고 네가 된다 - 변화로 성장하는 백합

백합만화 읽기 08

[이윽고 네가 된다 / 나카타니 니오 / 레진코믹스 / 전 8권(완결) / 권당4500~5000원(전자책)]


"오만일지도 몰라. 단지 나의 고집일지도. 그래도 그 사람을 바꾸고 싶어."




수많은 고백을 들었지만 번도 마음이 설렌 적이 없었던 나나미 토우코. 특별하다는 마음을 느껴보지 못했기에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없었던 코이토 유우.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도 않고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는 유우는, 그렇기에 토우코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한 반석 위에 고정되어 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일견 전혀 다른 듯하면서도 사실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닮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정통파 백합 만화. 




아이는 성장을 통해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건 단지 겉모습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의 자아를 구축하고, 그 자아의 토대 위에서 타인과 접촉하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기존의 자아를 무너뜨리고, 그 폐허 속에서 다시 한 번 자아를 구축한다. 그렇게 새로이 구축된 자아는 필연적으로 이전의 자아와 같을 수 없는 변화된 존재다. 성장이란 그러한 과정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토우코는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유우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채로 그대로 있어주기를 원한다. 유우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에, 유우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토우코는 유우를 좋아한다. 자신은 유우를 좋아하면서도 유우에게는 자신을 좋아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한다. 


미숙하기 이를 데 없는 응석이고 투정이다. 왜냐면 이미 토우코는 변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마음이 설렌 적이 없었다고 말하던 그가 유우 앞에서 설레어 한 바로 그 순간부터 토우코는 변하기 시작했다. 끝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 자신이 변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상대가 변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변하지 말아달라고 요구는 단지 어리광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서로가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순간, 그때부터 두 아이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된 소재는 연극이다. 토우코는 세상을 떠난 언니의 꿈이었던 연극 공연을 자신이 이루어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등장인물 간의 갈등이 생겨나고 다시 해소된다. 그리고 마침내 진행되는 연극은 극중극 방식의 사이코드라마에 가깝다. 아니, 사이코드라마라는 표현 그대로다. 토우코는 배우의 입장에서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연기함으로써 자신의 페르소나를 들여다보고, 그 과정을 통해 실제 삶에서의 결론을 이끌어냄으로써 한 단계 성장한다. 


그러다 보니 서사 전개의 세련미가 없다시피하다. 연극을 통해 작품 전체의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은 지나칠 정도로 직설적이라 낯뜨거움마저 느껴질 정도다. '만화로 보는 분석심리학' 따위의 학습 만화를 통해 겉핥기식으로 칼 융의 이론을 배우는 느낌이랄까. 극중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연극 부분은 실상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극복하기 힘든 난관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의 독보적인 장점은 다른 곳에 있다. 서사 연출의 부족함에 반해, 그림을 통한 연출은 매우 뛰어나다. 그림자와 빛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특히 역광을 잘 쓴다. 공간감을 통해 내면의 거리감을 드러내는 연출 스타일은 흡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서사보다는 표현에 방점이 찍혀 있는 만화다.  




서정적인 분위기와 인상적인 연출이라는 명확한 장점, 그리고 군더더기가 많은 전개와 도구적으로 소모되는 주변 인물이라는 명확한 단점이 상충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 만화의 본모습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본질은 명료하다. 이 만화는 미처 성장하지 못한 채 언제까지고 응석만 부리던 아이가 마침내 조금쯤 더 어른이 되는 이야기다. 아주 약간 더 먼저 성장한 꼬마가 손을 내밀어 뒤쳐진 꼬마를 이끌어주는 이야기다. 


그렇게 서로를 이끄는 가운데 서로가 자신의 변화를 인정하고, 나아가 변화한 자신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이윽고, 나는 내가 되고, 너는 네가 된다. 




사족인 걸 알면서도 현지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번역이 그다지 좋지 않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게 아니라, 한글로 표기된 일본어를 보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마지막 권에서는 일부 검열된 부분이 있다. 두 사람의 성애를 묘사한 장면을 아주 가차없이 허옇게 칠해 버렸다. 몹시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