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만화 읽기 10
[투룸, G펜, 알람시계 / 오사와 야요이 / AK커뮤니케이션즈 / 전 8권(완결) / 권당3000원(전자책)]
"싫나." "싫지 않아."
직장에서 누구나 능력을 인정하는 우수한 사원 카즈키 나나미. 반면 그와 동거하는 후지무라 카에데는 생활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데다 제대로 연재를 해본 경험도 전무한 만화가 지망생이다. 나나미는 그런 카에데를 위해 퇴근하면 밥을 차려 주고, 빨래와 청소를 비롯한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심지어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조차도 나나미가 월세를 내고 카에데는 얹혀 사는 처지다.
그렇다. 이건 누가 봐도 나나미가 무능한 기둥서방인 카에데를 먹여 살리는 모양새가 아닌가. 남말하기 좋아하는 치들이라면 왜 그렇게 손해보면서 사느냐고 비웃거나 흥분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건 외부인의 시선일 뿐이다. 본인들이 좋다는데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커플에 대해 온갖 혐오스러운 표현을 쏟아내면서 어떻게든 그들의 행복을 부정하고자 악다구니을 쓰는 인간들이 수두룩한 요즘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결국 당사자들의 행복이다.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제멋대로 재단하려 드는 인간은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법이다.
이 작품은 함께 사는 두 사람이 점차 서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본격적인 연애물이다. 헌데 그런 것치고는 나나미는 무려 네 권째가 되어서야, 그리고 카에데는 또다시 네 권이 더 지나고 나서야 자신이 상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덟 권짜리 만화에서. 이 얼마나 고전적인 전개인가.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마냥 좋기만 한 일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상대에게 보답받지 못하는 애정에 대한 두려움과, 제삼자에 대한 보기 싫은 추잡한 질투가 상존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러한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마저도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여 사랑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나미는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나미는 카에데를 사랑하면서도 망설인다. 카에데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한다.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고 있지만 상대의 성적 정체성은 어떠한지 모른다는 사실도 그런 망설임을 부추긴다. 그는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두려워한다.
카에데 또한 마찬가지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그에게 있어 나나미는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존재다. 그렇기에 카에데는 나나미를 사랑하면서도 망설인다. 나나미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한다. 심지어 나나미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애정을 고백했을 때조차, 카에데는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절하는 대신 단지 모른척하며 결정을 미룬다. 그는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두려워한다.
두렵다면 도망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작품 내의 독백을 인용해 보자.
'가볍고 즐겁게,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모르는, 그저 상대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대화. 본심이 아니니 보답을 바라지도 않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상처받는 일도 없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 나나미는 질투한다. 만화를 매개체로 하여 카에데와 친밀하게 교류하는 코유키를 질투한다. 과거 자신보다 먼저 카에데와 함께 살았던 아오이를 질투한다. 그리고 질투하는 자신을 인정한다. 그들을 질투할 정도로 카에데를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면서 나나미는 먼저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를 통해 끝내 상대마저 변화시킨다.
그렇기에 카에데와 나나미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관계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성장하며 또한 상대를 성장시킨다. 그런 관계가 바로 연인이며 또한 가족이 아닐까.
사실 백합이란 장르는 꽤나 마이너해서 시장이 작다. 심지어 성별만 다른 BL과 비교해도 훨씬 더 처진다. 그러다 보니 백합 만화로 데뷔한 작가가 이른바 '이쪽 세계'에서 떠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전자책을 읽은 후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 보아도 아무것도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런 소비자의 입장에서 여러 편의 작품이 정식 출시된 오사와 야요이는 꽤나 반가운 작가다. 본 작품이 괜찮게 느껴졌다면 <헬로 멜랑꼴리!>도 한 번 찾아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