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만화 읽기
왜 하필 백합 만화였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딱히 할 말은 없다. 대체로 사람이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데는 딱히 이유가 없는 법이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먼저 생겨나고, 이유는 뒤늦게 따라온다. 그래서 무언가가 왜 좋은지를 설명하는 건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명쾌한 논설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하는 지리멸렬한 자기합리화의 과정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애쓰는 건 그게 덕질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덕후들이란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걸 알리고 싶어한다. 내가 좋아하는 걸 공감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자기와 흡사한 인간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이라면, 자신과 같은 덕후들을 하나라도 더 늘리는 것이 덕후들의 근본 정신이다.
백합 만화는 대체로 인물 간의 관계성에 초점을 둔다. 물론 항상 예외는 있다. 육체적 성애 묘사를 주로 하는 백합도 있고, 동성애라는 맥락 자체에 심취하는 백합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문화가 그렇듯이 서로 다른 백합들 사이에도 우열은 없다. 다만 취향은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성을 다룬 백합이 내 취향이다.
어쩌면 그건 내 지극히 사적인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한 우울증으로 한동안 고생을 겪었고, 마음 붙일 곳을 찾기 위한 보복 소비에 가까운 느낌으로 전자책 수백 권을 무더기로 사들였다. 그중 우연히도 하나가 백합 장르였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네 권짜리 백합 만화 단편집이었다. 내가 굳이 그 단편집을 골랐던 이유는 아마 30% 할인 기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계기란 이토록 사소한 데서 비롯되는 법이다.
그렇게 접한 백합 만화들은 의외로 내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타인과의 힘겹고 아슬아슬한 관계성을 다룬 백합 만화를 읽으면서 나는 나와 타인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멋대로 가지를 뻗쳐 간 나의 생각들은 결과적으로 내가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 연유로 백합 만화를 읽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백합 만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찮은 이야기다. 하지만 인생이란 원래 대부분 하찮다.
이번 연재를 통해 열 두 가지 백합 만화를 소개했다. 내 전자책 보유 목록 중 백합 장르에 해당되는 건 총 86편 335권이고, 아직 구매하지 않은 채 장바구니에 잠들어 있는 책도 이십여 종쯤 된다. 그중 나름대로 남들에게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골랐다. 그리고 완결되지 않은 작품은 제외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저 막판에 나락으로 꼬라박는 만화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더 많은 작품들을 추천해 보려 한다.
SF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의 법칙이 있다. "SF의 90%는 쓰레기다. 하지만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다." 백합 만화도 그렇다. 특정 장르에서 우수한 작품을 찾아 해메는 건 지뢰를 밟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지난한 과정이다. 특히 백합 만화처럼 마이너한 장르라면 더욱더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러한 여정에 기꺼이 동참할 마음을 품게 되었을 때, 내가 쓴 글이 조금이나마 이정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누구 한 사람 칭찬해주지도 않지만 그런 마음으로 썼다.
덕질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