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곰과장 이야기 21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직업공무원제를 택하고 있습니다. 공개 경쟁 절차를 통한 채용과 신분 보장이 핵심이죠. 이를 통해 공무원 조직은 일관성과 지속성을 가지게 됩니다. 4년마다 선거를 통해 윗사람이 바뀌더라도, 일상적인 업무는 별문제 없이 지속적으로 처리된다는 뜻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장점이 있기 때문에 직업공무원제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세상사 모두 그러하듯 단점도 있습니다. 직업공무원제의 근간이자 원칙은 신분보장입니다. 직렬 등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만 60세의 정년이 보장되며, 어지간한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정년이 되기 전에 쫓아내지 않습니다. 비록 무능력자라 해도 쫓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민간기업보다 훨씬 더 조직이 경직됩니다. 피터의 법칙이죠.
여기까지는 공무원 조직 외부에서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는 조금 더 내부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공무원 조직은 정원이 경직적입니다. 특히 1급에서 9급까지 직급별 정원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지요. 대체로 위로 갈수록 급격하게 좁아지는 극단적인 피라미드 식 구조입니다.
요즘 핫한 충주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충주시 지방공무원 정원 조례’에 따르면, 충주시의 전체 공무원 정원은 1,516명입니다. 명목상 지방의회의 권한인 조례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실질적으로는 상위 법령 등의 강력한 규제를 받아서 정해진 숫자입니다. 직급별 정원을 보면, 정무직(선출직)인 시장 아래에 3급 자리가 하나(부시장), 4급 자리가 10개(국장), 5급 자리가 76개(과장, 읍면동장 등) 있습니다. 나머지 6급 이하가 전체 정원의 90%를 훌쩍 넘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중간관리자 이상에 해당하는 공무원들도 정년이 되기 전까지는 조직 내에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현행 제도하에서 공무원의 업무 성과에 따른 금전적 보상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성과급 최고등급 책정이라 해 봤자 남들보다 대략 연 200~300만원 내외의 금액을 더 받는 셈입니다. 민간기업처럼 조직 전체의 성과가 우수하다는 이유로 상여금이 나오는 경우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공무원에게 주어지는 실질적이고 유일한 보상은 승진뿐입니다.
그런데 일단 중간관리자 이상에 오른 공무원들은 각자가 해당 직급의 정원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한은 퇴직할 때까지입니다. 예컨대 59세 공무원이 충주시 4급 국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은 이듬해에 정년으로 퇴직합니다. 그 시점에 맞추어 5급에서 4급으로 승진할 수 있는 TO가 하나 생겨나는 식입니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공로연수에 대해 언급해야 하지만 복잡하니까 생략합니다.)
이제부터 가상의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가칭 ‘중추시’에서 일하고 있는 어떤 공무원이 있습니다. 이 능력자, 가칭 ‘중추맨’은 대단한 업무 성과를 발휘해서 고작 48세에 4급으로 승진해 국장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50대 후반인 지자체 국장들의 면면을 보자면 어마어마한 승진 속도죠.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조직 내에서 더 올라갈 수 있는 TO가 없는 겁니다. 중추시 전체에서 3급 정원은 부시장 단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기초지자체의 부단체장은 많은 경우 광역지자체에서 옵니다. 즉 4급 국장인 중추맨은 더이상 승진할 수 없습니다. 본인의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자리의 숫자가 문제인 겁니다.
자. 일단 중추맨의 입장에서 봅시다. 48세에 국장을 달았으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승진하지 못합니다. 공무원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인 승진의 가능성이 아예 사라진 겁니다. 의욕이 날까요? 그럴 리가요. 열심히 일해야 할 원동력이 있나요? 오직 본인의 양심에 기대어야 할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물에 젖은 이불 마냥 축 늘어지게 됩니다. 동기부여가 안 되잖아요.
자. 이번에는 중추시 공무원의 입장에서 봅시다. 중추맨이 48세에 국장을 달았습니다. 이 사람이 더이상 승진할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압니다. 문제는 직급별 정원입니다. 중추시의 4급 정원은 고작 10명입니다. 그런데 은퇴가 10년 넘게 남은 중추맨이 그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중추맨은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향후 10년이 넘도록 누군가가 5급에서 4급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근본적으로 없애고 있는 겁니다. 마침 상황이 흡사한 충주시의 작년 4급 승진 TO는 고작해야 상반기에 셋, 하반기에 하나였습니다. 기존에 있던 4급 중 누군가가 정년으로 은퇴해야만 자리가 나니까요. 그렇다면 중추맨은 실질적으로 하급자의 승진 기회의 삼분지 일 가량을 잡아먹고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자연히 하급자들의 불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게 이른바 ‘승진길을 막는다’는 상황입니다.
자. 마지막으로 인사권자인 중추시장의 입장에서 봅시다. 중추맨은 워낙 일도 잘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기에 중추시장은 그를 파격적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사실 6급까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정원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5급이나 4급은 문제가 다릅니다. 이른바 중간관리자 직책을 부여하는 직급이고, 정원 자체가 워낙 적습니다. 인사권자가 조직을 관리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인사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중추맨의 존재로 인해서 자신의 임기 내내 승진 자리가 하나 줄어든다면, 조직에 줄 수 있는 승진이라는 이름의 당근이 줄어듭니다. 결국 인사권자의 명령이 안 먹힐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죠. 이런 상황까지 가니 중추맨은 이제 조직의 원활한 운영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중추맨의 잘못이 있었나요? 없습니다. 그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잘해서 높은 성과를 냈을 뿐입니다. 다른 중추시 공무원들에게 잘못이 있었나요? 없습니다. 승진이라는 보상이 줄어드는 데 불만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인사권자의 잘못이 있었나요? 없습니다. 인사권자는 높은 성과를 낸 사람을 승진시킨다는 올바른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요? 중추맨은 지금까지의 의욕을 잃었고, 대다수 조직 구성원들의 앞길을 막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공무원들은 ‘승진길이 막혀서’ 불만이 커졌습니다. 시장은 향후 자신의 인사권을 스스로 좁혀 버리는 자충수에 빠졌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모두가 불편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추맨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실질적으로 하나뿐입니다. 다른 기관으로 가는 겁니다. 주로 상위 광역지자체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광역지자체는 조직의 크기가 커서 4급 자리가 훨씬 많습니다. 또 고시 출신들이 많다 보니 젊은 중간관리자에 대한 반감도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대신 광역지자체에서는 4급이 과장이니까 직급은 그대로라도 직책은 실질적으로 강등된 셈입니다. 업무량도 대체로 더 많습니다. 그래서 기초지자체 4급 공무원이 광역지자체로 가는 건 대부분 울며 겨자 먹기입니다.
한편 인사교류는 1:1이 원칙이기에, 광역지자체에서는 중추시로 다른 4급 공무원을 보냈습니다. 48세가 아닌 58세로요. 이 공무원은 중추시에서 두어 해 일한 다음에 정년으로 퇴임합니다. 이로써 다시 4급 승진 TO가 하나 생겨났고, 결국 중추시의 모두가 행복해졌습니다. 이미 중추시를 떠난 중추맨 본인만 빼고 말입니다.
지난 글에서 저는 인사권자가 제일 싫어하는 승진 방식이 연공서열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승진자를 결정하는 자신의 권한이 줄어드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연공서열에 따른 승진은 없어지지 않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바로 이러한 사례 때문입니다. 연공서열에 따라 나이와 경력이 많은 사람 위주로 승진시킨다면 그들이 빨리 은퇴할 것이기 때문에 승진 TO가 많이 생깁니다. 나이 든 상급직 조직원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가 가해지니 조직 운영 또한 수월해집니다.
물론 부작용도 만만찮습니다. 연공서열만으로 승진자를 결정한다면 반대로 젊은 직원들은 열심히 일할 유인이 사라지게 됩니다. 열심히 일해도 보답받지 못할 테니 조직원들은 당연히 복지부동에 전념하겠죠. 조직 자체의 역량이 추락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조직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실적주의와 연공서열을 적절히 조화시켜서 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공무원 조직은 그렇습니다. 좀 더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 링크를 참조하셔도 좋겠습니다.
https://brunch.co.kr/@gorgom/228
누군가의 빠른 승진이 ‘승진길을 막아서’ 조직 전체의 사기가 떨어지는 역설은, 직급별 정원이 심하게 경직된 공무원 조직에서 특히 자주 발생하는 일입니다. 본질적으로 대한민국 직업공무원제가 내포하고 있는 한계점이기도 하지요. 큰 조직보다는 작은 규모의 조직에서, 상위 기관보다는 하위 기관에서, 그리고 중앙부처보다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더 자주 발생합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 있는 젊은 직원에게는 이른바 큰물로 가라는 권유를 종종 하기도 하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더 머리 좋은 양반들이 고민해도 안 나오는 답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그렇기에 조직의 인사권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을 각자의 자리에 적절히 배치하고 적절하게 기용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거든요. 동시에 실적주의와 연공서열도 조화롭게 써야 하고요. 그건 삼국시대 조조가 유재시거(唯才是擧)를 내세웠던 이천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