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곰과장 이야기 04
보통 '근평'이라고 줄여서 말하는 근무성적평정은 공무원이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보상이자, 관리자가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보상책입니다. 물론 단기적으로 줄 수 있는 보상은 몇 가지가 더 있긴 합니다. 예컨대 기관장 표창이나 모범공무원 선정, 높은 성과상여급 등급이나 해외연수 기회 등이죠. 그러나 가장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보상은 단언하건대 근평 단 하나뿐입니다.
근평이란 그 공무원이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었는지를 측정해서 등급을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일 년에 두 차례 시행하죠. 크게는 수/우/양/가 네 등급이 있고 같은 등급 내에서도 소숫점 단위로 세부등급이 나뉩니다. 지나치게 구체적인 내용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일정기간 동안 높은 등급을 받아야만 승진할 수 있다.
둘째. 수 등급은 해당직급 전체 인원의 20%만 받을 수 있다.
공무원은 해당 직급의 승진소요 최소연수 이상을 근무한 상태에서, 직급별로 다르지만 최근 2~4년간의 근무성적평정 점수가 얼마였는지를 반영해 승진서열명부가 결정됩니다. 즉 승진을 하려면 반드시 일정기간 이상 '수'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하였다시피 수는 전체 인원의 20%밖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수'를 받는지의 여부가 그 사람의 승진 시점을 결정하게 되지요. 이렇게 근평에서 '수' 등급을 받는 것을 공무원들은 대개 '근평을 받는다'고 표현합니다.
공무원들은 근평을 받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첫째로는 업무에 있어 좋은 성과를 내려 합니다. 평소보다 일을 더 열심히 하지요. 둘째로는 성과를 내기 좋은 부서로 가려 합니다. 이른바 주요부서나 주무과, 혹은 해당 기관의 핵심사업을 추진하는 곳으로 말입니다. 셋째로는 윗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려 합니다. 유달리 행사에 자주 따라다니고 술자리에도 열심히 참석하지요. 넷째로는 경쟁자를 헐뜯고 깎아내립니다. 남몰래 뒤에서 이상한 소문을 낸다거나 합니다. 다섯째로는... 흐음. 그만하지요. 어쩐지 뒤로 갈수록 안 좋은 이야기만 나오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 핵심은 첫번째에 있습니다. 그래야 조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겠지요?
과거에는 근평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 연공서열이었습니다. 즉 얼마나 근무를 오래 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했지요. 그러나 요즘은 그런 성향이 많이 옅어졌습니다. 물론 기관이나 조직마다 워낙 성향들이 달라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곰과장이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대신 상대적으로 성과주의가 강조되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젊고 유능한 사람들의 승진이 빨라지는 현상이 보이고 있습니다. 선배들은 때때로 한탄하기도 하지요. '나 때는 한 계급 승진하는 데 X년이 걸렸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절반밖에 안 걸리더라고'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무원 조직은 위로 갈수록 극단적으로 폭이 좁아지는 피라미드형 조직이며 계급별 인원 또한 여러 가지 규정에 의해 정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일 년 빨리 승진할 때, 필연적으로 어떤 사람은 일 년 늦게 승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직원들이 근평을 두고 펼치는 경쟁은 나날이 강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간관리자들의 부담도 늘어났지요. 왜냐면 이 글의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공무원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 근평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부서장이 유능한 사람을 데려와서 쓰려면, [근평을 보상으로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근평을 줄 수 있는 숫자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서장들은 필연적으로 타 부서와 경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 볼까요. 내 직원에게 근평을 챙겨주려면 남의 입에 들어갈 근평을 빼앗아 와야만 합니다. 근평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부서 간 이전투구가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일 잘하고 유능한 직원에게 근평을 챙겨주지 못한다면, 그 직원은 근평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자리를 찾아 훨훨 날아가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무원 조직은 부서 간 이동이 상당히 수월하니까요.
그렇기에 공무원 조직은 무작정 좋은 인력, 즉 일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만 한 곳에 끌어모으기가 제도적으로 어렵습니다. 승진을 위해 근평이 필요한 사람, 즉 유능하거나 연차가 찬 직원이 있다면 하위등급을 받으면서 아래에서 받쳐줄 직원도 필요합니다. 근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20%에 불과하다는 건, 극단적으로 말해 네 사람의 희생이 있어야만 비로소 한 사람이 근평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국장은 국 단위에서, 부서장은 부서 단위에서 동일직급 직원들의 승진 연도와 능력 등을 따져보고 그에 맞추어 조직을 구성합니다. 인사 담당 부서에서도 당연히 그런 부분들을 감안하여 인력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 근평을 받게 된 사람은 그 반대급부로 어렵거나 골치 아픈 힘든 일을 맡게 됩니다. 이게 공무원 조직이 돌아가는 구조이며, 아무도 하기 싫어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법도 합니다. 어째서 공무원 조직은 아직도 연차에 따라 근평을 챙겨주고 승진을 시키는 것일까요? 그건 성과주의와는 어긋나는 것 아닐까요?
간단한 이치입니다. 몇 번이나 강조했듯 조직 내의 모든 직원이 일을 잘할 수는 없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직원도 필요하지요. 그런데 공무원 조직이 개인에게 주는 실질적인 보상은 승진(=근평)뿐입니다. 즉 일을 열심히 하지만 잘하지는 못하는 직원에게도 근평을 주지 않으면, 일을 잘하지 못하는 대다수 직원들은 일을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이건 조직 구성원 80%의 생산성과 능률을 대폭 깎아버리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또 오래 근무한 사람에게도 보상을 주어야만 조직이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무원 조직의 연공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사라질 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