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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쫑 Jan 18. 2021

눈 덮인 남한산성

창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보다 나도 모르게 운동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내가 달리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달리며 눈에 담는 경치 때문인 이유가 더 크다. 실내를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그림이다. 그 안에는 여유도 있고, 자유분방함도 있어 평소 빡빡한 생활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가슴이 답답할 때, 무슨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습관적으로 달린다. 고민의 깊이가 깊은 때일수록 달리는 거리도 늘어난다. 이런 나의 습관이 우리 가정의 행복을 만들었고 훌륭한 직장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나는 루틴(routine)하게 달리기를 한다. 하지만 겨울은 달리기 쉽지 않은 계절이다. 추워서 그렇기도 하지만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러워 달리다 부상당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눈길을 달리며 경치를 눈에 담을 수만 있다면 이때 달리기는 눈의 사치 치고는 최고일 것이다.

  결혼하며 터전을 잡은 곳이 남한산성이 가까운 지하철 산성역 부근, 두 딸 대학 진학하면서 서울로 갔다가 8년 만인 작년에 다시 돌아왔다. 예전에 비해 남한산성은 많이 정비되어 깨끗하다. 산성 안에 임금이 머물던 행궁도 복원했고 산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도 무너진 곳은 정비하여 말끔하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남한산성을 찾는다. 하지만 겨울, 특히 눈이 많은 날에는 남한산성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차량이 통제되기도 하고 산길은 눈에 덮여 등산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의 눈 덮인 모습을 눈에 담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2주 전에도 눈이 많이 왔다. 그때는 칼바람에 강추위가 몰아쳐 밖으로 나가기 쉽지 않았다. 오늘은 포근하게 눈이 내린다. 나는 운동복을 주섬주섬 꺼내 입었다. 아름다운 남한산성 경치가 눈에 아른거려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 두 다리가 있으니 차가 안 다녀도 갈 수 있다. 조심만 하면 달려서 못 갈 곳은 없다.

  남한산성 오르는 도로는 염화칼슘을 뿌려 눈이 녹았지만 갓길은 눈이 수북하다. 시내버스는 통행제한으로 다니질 않고 가끔 승용차만 조심스럽게 오른다.      

  남한산성 가는 길의 설경은 눈이 가는 곳마다 절경이다. 눈발이 흩날리지만 그것조차도 내 눈고 싶을 정도다. 평소 자주 달리며 오르던 길이지만 오늘 같은 풍경은 쉽게 접할 수 없다. 남한산성 가까이 산다는 것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시간이고 달리기를 좋아하기에 몸으로 맞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런 풍경은 가쁜 숨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게 만든다. 그동안 내가 달리며 느꼈던 자연은 나에게 무한한 자신감을 주었고 지금 이 순간도 벅찬 감동을 주고 있다.  

  남한산성은 세 개의 산으로 이어져있다. 잠실에서 보이는 산은 청량산, 성남에서 보이는 산은 검단산, 하남에서 보이는 산은 남한산이다. 세 개의 산 정상을 이어 산성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행궁과 마을이 있다. 내가 뛰어서 올라가는 길은 청량산 줄기라고 볼 수 있다. 청량산은 수어장대가 있는 곳으로 병자호란 때 그곳에서 잠실 쪽을 바라보며 청나라 군대의 동향을 살폈다. 청량산은 북쪽에서 내려온 청나라 군대를 막는 최후의 보루였. 실제로 청량산 수어장대에 오르면 송파나루가 한눈에 보인다. 지금은 롯데타워가 그 자리에서 갈치 비늘 같은 은빛을 발하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지만.

  조선 시대 역대 왕 중에서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한 두 명의 왕이 있었으니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내가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때 유독 광해군의 역사를 다시 보는 것은 남한산성을 가까이 두고 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조(능양군)의 친형인 능창군은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다. 임진왜란 당시 위약한 왕이었던 선조, 차남인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국운을 걸고 싸웠던 개혁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왕좌에 오른 광해군은 개혁을 시도하며 많은 정적을 죽였는데 그중에는 능창군도 있었다. 그는 1615년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형의 죽음으로 복수를 꿈꾸던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다. 역사란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인조 때의 기록에 의해 광해군은 왕이 아닌 한 명의 군신으로 기록된다. 이렇게 집권한 인조는 불안정한 정권이었다. 반란으로 집권한 탓에 내란에 휩싸이고 급기야는 청나라의 입을 받게 된다. 1636년 12월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청나라 군대가 이미 평양에 도착했다는 전갈을 받고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40일을 버티다 다음 해 1월 30일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에서 청 태종에 무릎을 꿇었다. 인조는 궁궐로 돌아왔지만 남한산성 안에서는 많은 민초들이 굶주려 죽었고 그 누구도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남한산성은 몇백 년을 지난 지금까지도 한이 맺혀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에는 네 개의 문이 있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내려간 청량산에 있는 문이 서문이다. 그리고 하남에서 남한산성 로터리 마을로 올라오다 만나는 동문, 남한산 초등학교 뒤쪽의 북문은 남한산에 있다. 남한산성 네 개의 문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남문(지화문)은 청량산과 검단산을 잇는 중간에 있다.

  내가 집에서부터 뛰어 남문에 도착하면 거리는 5km. 청량산 정상의 수어장대로 다시 뛰기 전 이곳에서 성남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곳이기도 하다.

  남문을 저 앞에 두고 좌측의 청량산 수어장대 쪽을 바라보니 산 전체가 눈보라에 휩싸여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남한산성 입구 청량산의 모습

  나에게 남문은 너무나 정겨운 곳이다. 자주 올라와 만나다 보니 마치 이웃집 문에 들어서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남문으로 오르는 오솔길에 수북이 쌓인 눈,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인간의 발자국 없이 그대로 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인간의 발자국은 이런 아름다운 풍경에는 상처가 된다.

  지화문(門). 병자호란 때 인조는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피신했다. 지금의 문은 정조 3년에 개축하면서 지화문이라고 지었다는데 한자의 대략 해석이 모든 게 순리에 닿는다는 뜻인 걸 보면 정조는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를 책하면서 지은 이름은 아닌지...

   남문(지화문) 앞에 서서 나는 한동안 넋을 잃는다. 수없이 남문을 오갔지만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눈 속에 남문, 이건 천상의 문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상상 이상의 풍경이라 눈에 다 담을 수도 없다. 손으로 뚝 떼어내 누군가에게 하고 싶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본 적 있소? 하고 말이다. 


남한산성 남문(지화문)

  남문을 넘어 들어오던 인조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회한에 젖었을 것이다. 지난 역사를 생각하니 나 또한 만감이 교차한다. 인조가 아닌 고생했을 민초들 때문이다. 왕을 위한 희생은 덧없을 뿐이다.

  어느덧 눈보라가 잦아드니 남문 아래 저 멀리 성남시가지가 보인다. 눈은 더 오지 않을 것 같다. 햇빛이 비치면 시야는 좋겠지만 눈이 녹아내려 이 아름다움이 사라질 것이다. 남문에서 남한산성 마을로 뛰어 내려오는데 날씨가 갠다. 선명해진 날씨에 도화지의 그림 채도가 선명하다. 저 멀리 행궁이 뚜렷한 선으로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행궁 뒷산 정상에 수어장대가 있다. 영하의 온도니 햇빛에 이 아름다운 풍경이 쉽게 녹아내리진 않을 것 같아 다행이다. 행궁은 인조시대에 지어진 별궁으로 소실되었다가 2007년에 복원되었다.

남한산성 행궁

  세 개의 산으로 둘러 쌓인  남한산성 마을은 고즈넉하다. 평소에는 산행객들로 붐볐을 이곳은 적막하다. 하지만 내 맘은 더 푸근하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민초들이 모여 살았던 산성 마을이다. 병자호란의 전란 속에서 굶주리며 왕의 호의호식을 지켜보던 그들의 맘은 어땠을까? 민초들은 누가 왕이 되든 맘 편히 살고 배곯지 않게 해주는 게 좋은 임금이었을 테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한 마리 새가 유유히 하늘을 난다. 몇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달렸 그 언젠가 나도 날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남한산성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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