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24일간 걸어 국토 1000km를 종횡단한 58살 청년 이야기
6일 차 2017. 6. 9.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대청호-대전시 둔산대교 갑천공원 (43.5km)
이틀간의 109km 도보 강행군은 정신력으로 걸은 것도 있었다. 어제 오후부터 왼쪽 발목이 조금씩 아픈 것 같았지만 걸을 만은 했기에 참고 걸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꽤 많이 부어올랐다. 엊그제 빗속에서 강행군하며 다리에 무리가 간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걸을 수도 없으니 이 아침에 고민하고 말 것도 없었다. 다만 나는 왼쪽 발목에 더 무리가 가지 않게 신경 쓰며 걸어야 했다. 걸으며 낫기를 바랄 뿐이었다. 왼쪽 발목이 한눈에 봐도 알아볼 만큼 부어올라 친구에게 말하면 괜히 걱정할 거 같아 몰래 방에 들어가 발목 위와 종아리까지 테이핑을 하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친구 아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을 하고 있었다. 내가 6시 반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했더니 새벽에 일어났나 보다. 친구 아내는 점심으로 도시락김밥까지 손수 싸 주었다. 나는 넉살 좋게 얻어먹는 김에 쌀과 반찬도 좀 달라 해서 배낭에 넣었다. 나는 오늘부터 내리 4일간은 야영이기 때문에 저녁 먹거리를 점검해야 했다. 야영할 때는 되도록이면 저녁 6시 반 전에는 도착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텐트를 치고 식사 준비를 해야 하기에 시간 안배와 준비물에 더 철저해야 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할수록 야영의 흥취를 맘껏 느끼며 자연 속에서 낭만의 밤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침 6시 반에 아쉬운 작별을 하고 친구 집을 나왔다. 어제 친구와 같이 걸어왔던 낙가천이라는 실개천을 따라 1.5km 걸어 내려가 다시 청주 시내 중심을 흐르는 무심천에 닿았다. “無心” 얼마나 좋은 말인가. 무심천은 고려시대에 심천(沁川)이라고 불리었고, 조선시대에는 석교천, 대교천으로 바뀌었다가 1920년대부터 무심천으로 불리었다고 하는데 불교의 무심에서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無心(무심)하게 살면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욕먹기 십상이지만 有心(유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세상이 이렇게 혼탁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심하게 무심천을 걷자니 내가 마치 수도승이 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상쾌한 맘으로 걸으며 잠시 불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나는 이번 도보여행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나는 과연 내 맘 속에 있는 탐욕을 버릴 수 있는가? 답을 구할 순 없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은 불자가 되어 무심천을 걸었다. 무심천을 6km 정도 걸으니 둑 위로 길이 연결되었고 그 길을 따라 우측에는 논밭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 펼쳐졌다. 이른 아침 시간인데 일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손길이 바쁘다. 요즘은 낮에는 더워서 일 못하고 아침 5시에 나와 일하고 한낮이 되기 전에 마친단다. 비가 왔지만 병아리 오줌만도 못하다고 가뭄 때문에 작물이 다 말라죽겠다고 하는데 엊그제 비를 원망하며 걸었던 내가 다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무심천이 끝나 대청호 방향으로 우회전해서 국도와 만나는 고은삼거리까지는 청주 상당구 친구 집 출발지에서는 8.7km. 부어 오른 발목이 계속 신경이 쓰여 걸음걸이가 자연스레 더뎌졌다. 나는 부어 오른 왼쪽 발목도 쉬어줄 겸 그늘에 앉아 잠시 쉬었다. 부은 데는 얼음찜질이 최고인데 지금 걷는 길에서는 얼음을 구할 수도 없거니와 구한 들 뜨거운 날씨에 얼음이 바로 녹아 찜질이 잠깐뿐일 것이다. 자세히 발목을 살펴보니 부은 정도가 생각보다는 심각하여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오늘 목적지 대전까지는 아직 삼분의 일도 못 왔는데.. 왼쪽 발목이 계속 신경 쓰이니 걸으며 온통 아픈 발목 생각뿐이었다. 만약에 증상이 더 심각하여 걷는 걸 포기하는 상황까지 가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이건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이었다. 나는 일부러 아픈 발목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주변 경치에 더 관심을 쏟으며 걸었다. 이렇게 6km 정도를 걸어 대청호가 보이는 문의 삼거리에 도착했다. 디딜 때마다 왼쪽 발목의 통증이 느껴져 디딤을 가볍게 하려다 보니 내 신체의 균형은 약간 오른쪽으로 쏠린듯하게 걷는 모양으로 걷게 되었다. 영락없는 짝 다리 보행이었다.
아름다운 호수의 경치는 약만큼이나 효과가 있었다. 걸으며 통증이 있던 왼쪽 발목은 대청호반로를 걸으면서는 호수의 경치에 압도당한 듯 아픈 걸 잠시 잊게 했다. 문의 삼거리에서 시작하여 걷기 시작한 대청호반로는 대청호를 왼쪽에 두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데 대청호 전망대까지 8km의 이 길을 걸으며 신기하게도 왼쪽 발목이 아픈지도 모르고 걸었다.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대청호 경치 때문에 잊은 거겠지. 대청호를 끼고 걷는 대청호반로는 말 그대로 환상의 걷기였다. 좌측의 대청호를 보며 숲이 우거진 산길 도로를 걷는 것은 쌓인 피로를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차량도 뜸하여 사이클 연습하기에 좋은 도로인지 코레일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어찌나 길이 아름답게 펼쳐졌는지 멀찍이 보이는 사이클 선수들은 영화 속 배우들이었다.
대청호는 인공 호수로 호수 길이가 자그마치 80km나 된다. 대전광역시와 청주시, 옥천군, 보은군에 걸쳐 흐르는데 나는 지금 청주시의 대청호를 호수 유람하듯이 걷고 있는 중이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 대청댐전망대에 오르니 대청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곳에서 본 대청호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여기까지 걸어온 거리가 21km, 배가 출출하여 시간을 보니 12시가 넘었다. 아침에 친구 아내가 손수 만든 김밥을 건네며 요즘 낮엔 더우니 늦지 않게 먹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혹시나 하고 꺼내 냄새를 맡아보니 김밥은 아직도 아침 그대로였다. 친구 아내는 걸으면 얼마나 배가 고픈지 안다는 듯 꽤 많은 김밥을 싸 주었다. 나는 그 많은 김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내가 걸으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소화는 금방 되니 아무리 먹어도 체할 일은 없다는 거였다. 배가 꽉 차니 졸음이 밀려왔다. 양말을 벗고 부은 왼쪽 발목을 보니 괜히 봤다 싶었다. 오른쪽 발목과 비교하니 부은 게 확연히 차이가 났다. 부은 발을 애써 외면하며 다리도 쉬게 할 겸 나는 대청댐전망대 정자에 누웠다. 평일이라 전망대에는 나 한 사람뿐이라 정자에 누운 날보고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혼자만의 여행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란 게 이런 거지. 누웠지만 잠은 안 왔다.
대청댐전망대는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가 보다. 편의점이 있는 걸 보니 그렇다. 편의점에서 냉커피용 얼음을 사서 잔뜩 부어오른 왼쪽 발목에 대고 살살 문지르면서 한참을 쉬었다. 조금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한 시간을 이렇게 쉬었다. 이렇게 오래 쉬다 보면 좋긴 하지만 출발할 때 다시 발을 떼기가 쉽게 않다. 계속 쉬고 싶은 유혹이 출발하려는 나를 붙잡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식사시간을 제외한 쉬는 시간은 가능하면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결국 다시 본래의 도보 목적으로 돌아가서 두 다리에 신체적 고통이 가해질 때 저절로 해결된다. 하지만 지금은 부은 발목 얼음찜질도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시간을 넘게 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