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과 오늘. 똑같다 맘은

작은 딸과의 대화

by 김쫑

2007. 3. 20

발신 : 아빠

수신 : 작은 딸

제목 : 아빠가 제일 사랑하는 예슬아


아빠가 인터넷 제일 기다린 건 아마도 우리 예슬이땜일 거야. 방금 인터넷 수리 끝났어. 아빠 떠나는 날 너무 슬퍼서 아빠도 눈물이 나는 걸 억지로 참았단다. 예슬이 이제 좀 맘이 괜찮아? 우리 예슬이를 아빠가 너무 사랑하는데 이렇게 떠나오니 더욱 보고 싶구나. 예슬이 아빠 없어도 잘할 수 있지? 아빠는 믿어. 그래서 여기 올 수 있었던 거구. 엄마 말 잘 듣고 언니랑 잘 지내고. 알았지?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겠지.

아빠는 대학교 1, 2학년을 맡았어. 나이는 18~22살 정도. 여학생이 많아. 한 반에 20~25명 정도 돼. 아빠가 묵는 학교기숙사 방은 있을 건 다 있어. 걱정 마. 학교 식당도 니네 학교 운동장보다도 커. 음식 종류는 100가지도 넘어. 우리나라 돈으로 300원이면 사 먹을 수 있어.

예슬이 중학생 되니 공부하기 힘들지? 힘들더라도 아빠랑 같이 하자. 아빠도 중국어 배우려면 쉽지 않은데 해낼 거야. 예슬이두 파이팅! (아빠가 예슬이 엉덩이 툭툭 치고 있음 ㅎ). 이젠 아빠 없는 생활에 익숙해져야 해. 언니랑 엄마랑 잘 지내도록 해요, 알았지? 아빠도 안 울게 예슬이도 안 울기. 약속해요~~


>>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중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는 40대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커리어를 쌓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1년을 아무 수입도 없이 중국에 공부하겠다고 가는 건 이기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기회가 생겨 급히 베이징에서 산동성으로 방향을 바꿨다. 현지 교수 수준의 월급도 받았다. 그러면서 그 대학 교수에게 중국어 과외를 받으며 언어와 중국을 배웠다. 현지 교수 월급임에도 그 당시는 한국돈으로 푼돈 수준이었다. 돈을 아끼기 위해 학교에서 제공하는 낡은 기숙사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매일 교실과 도서관을 드나들며 아끼며 생활했다. 집에 갑자기 수입이 끊겼는데 손 벌리는 건 염치가 없어 쥐어짜며 생활했다. 중국의 가능성을 보고 왔기에 1년간의 어학 공부를 통해 최고 수준의 HSK(중국어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어려운 시기 가족의 메일은 큰 힘이 되었다. 지난 글들에는 감춰진 눈물이 묻어 있다. 지금 다시 보니 그때보다 눈물이 더 난다. 왜일까?


PS : 학교에 부임했더니 기숙사의 인터넷 연결이 되다 안되다 했다. 그래서 도착하고 안부전화하며 아내와 딸에게 컴퓨터 사용이 원활치 못할 수도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학교 전산과 학생들이 와서 이틀 만지더니 인터넷이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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