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차 강화도 순례] 설레는 출발,국토횡단(2)

배낭 메고 24일간 걸어 국토 1000km를 종횡단한 58살 청년 이야기

by 김쫑

제 15장 설레는 출발, 국토횡단(2)


15일 차 2017. 6. 24 강화도 외포리–강화읍- 강화도 초지대교 (42.0km)


고비고개를 넘어 내려가 한참을 걸어 강화읍이 가까워오자 제일 먼저 강화산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산성의 문인 강화서문. 강화산성은 1232년 고려가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착공한 것으로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긴 중성의 길이는 5천 미터를 넘었다고 한다. 원래 이 성들은 모두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고려가 1270년 다시 개경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 버렸다가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고 병자호란 때 또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가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지금의 산성이 되었다 하니 아픈 역사만큼이나 굴곡진 삶을 가진 산성이었다.

강화산성 서문


외포리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지금 시간이 오후 2시. 17km를 걸었다. 한시간에 4.3km로 걸었으니 나름 계획대로는 걸었다. 남은 거리를 감안하여 식당에 들어가 점심 먹는 건 포기해야 했다. 출발이 워낙 늦었기에 점심식사 기다리는 시간도 절약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내 두 다리는 계속 걸어도 문제가 없었다. 첫날 강행군도 괜찮다. 나는 김밥과 인절미를 사서 걸으며 먹었다.

강화도는 발 딛는 곳마다 역사의 흔적이기에 앞만 보고 갈 수는 없었다. 나는 강화서문 맡은 편 연무당 옛터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아픈 역사의 현장 연무당 옛터라고 쓰여 있는 안내문을 읽고 또 읽었다. ‘연무당은 1870년(고종 7년) 강화유수부의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워진 조련장으로 1876년 일본과의 강압적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덩그러니 남은 화강암의 사각형 주춧돌이 이곳이 아픈 역사의 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한 손에는 김밥, 한 손에는 물을 들고 강화 읍내로 걸어 들어갔다. 좌측으로 고려궁지가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꺾어 들어갔다. 크진 않지만 공원 같은 것이 있고 우측에는 한옥 모양의 건물이 있는데 영락없이 옛 궁궐 모양의 한옥이기에 저곳이 고려궁지인가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곳은 천주교 강화성당이었다. 1900년에 세워진 강화성당은 한옥양식의 건물로 서양의 종교와 한옥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100여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으며 경내가 어찌나 숙연한지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나는 강화성당을 내려와 고려궁지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고려궁지는 1232년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도로 옮긴 후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 동안의 왕궁터였다. 하지만 고려궁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후에 조선 정조가 의궤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외규장각이 한쪽에 복원되어 있었다. 원래의 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이곳의 의궤나 도서를 약탈해가면서 불태워져 없어졌다니 몇 백 년을 두고 이어진 이곳의 역사가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고려궁지 터의 외규장각

강화도는 눈물의 섬이기도 하다. 항몽의 역사와 개화기 프랑스, 미국, 일본에 당했던 눈물의 역사가 나의 혼을 일깨워줬다. 국토종단 첫째 날 임진각에서 본 분단의 역사, 둘째 날 서대문형무소에서 느낀 일제의 역사, 오늘 내가 본 눈물의 강화도가 하루 이틀 지나면 또 잊혀 질까 두려웠다.

고려궁지에서부터 갑곶돈대까지는 4km. 강화읍을 둘러본 나는 강화대교를 향해 걸었다. 강화해협을 따라 초지대교 방향으로 걷기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강화대교는 초지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강화도가 육지와 연결된 유일한 다리였다. 지금도 대부분의 노선버스는 이 다리로 다닌다. 나는 강화대교를 건너기 전의 갑곶돈대에서부터 시작하여 강화해협 해안 길을 걸어갈 예정이다. 나는 강화도의 중심도로인 강화대로를 따라 걸었다.

강화 읍내를 빠져나와 갑곶돈대에 오르니 강화해협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갑곶돈대에서 본 강화해협은 강화도와 김포를 사이에 두고 수 천 년을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강화해협은 김포평야와 같은 풍요를 주기도 했지만 때론 강화도를 군사적 요충지의 섬으로 만들었다. 고기잡이배를 지척에 두고 아직도 길게 드리워진 해안가철책은 저 멀리 고려시대의 몽고군에서부터 병인양요의 프랑스군, 신미양요의 미국군, 운양호 사건의 일본군으로 이어졌던 항전의 역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갑곶돈대에서 바라 본 강화해협철책

갑곶돈대를 내려와 샛길로 접어드니 강화 나들길 2코스 길이었다. 이 길은 초지진까지 이어졌으며 강화해협 둑을 걸어 이어지기도 하고 해안동로와 나란히 가는 산책길로 이어지기도 했다. 맨 땅의 길이기도 하고 해안가 산길을 따라 걷기도 하여 진정한 둘레길을 걷는 느낌을 주었다. 강화해협 끼고 걷으며 유적지를 답사하는 건 강화도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도보여행의 백미였다.

강화 나들길 2코스는 말 그대로 자연친화적인 둘레길이었다. 주의하여 걷지 않으면 돌부리나 풀 섶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을 정도였다. 우리 어린 시절 시골에서 걸었던 논둑길 같은 그런 길이었다.

갑곶돈대에서부터 초지진까지는 12.5km. 주변 경관은 좋지만 어디는 맨땅의 울퉁불퉁한 둑길이고 산길로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해안가 돈대(墩臺)나 보(堡) 진(鎭)도 답사하면서 걸어야 하니 평탄한 거리에 비해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더라도 나는 좀 더 빨리 걸어야 했다. 지금처럼 걷다가는 밤 10시나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해안가 나들길 2코스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아스팔트길보다는 발 디딤의 느낌은 훨씬 좋았다.

더러미 포구를 지나 용진진을 거쳐 화도돈대 가는 길은 해안가를 바로 옆에 끼고 둑길을 따라 걷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이름 모를 꽃들이 활짝 피어 나를 반겼다. 둑길 좌측으로 길게 이어지는 강화해변의 갯벌은 자연 그대로였다.

내가 걷고 있는 속도로 오늘 저녁 몇 시에 목적지에 도착할 건지 셈해보니 발걸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자칫 늦으면 해안가 밤길을 걸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용당돈대, 화도돈대, 오두돈대의 산길은 말 그대로 낮은 산 산행이었다. 뛰어 올라가 재빨리 보고 다시 내려오고. 나는 다시 광성보로 향했다. 광성보에 도착하니 저녁 6시. 간신히 표를 끊고 들어갔다. 광성보는 전체가 크기도 하고 둘러볼 곳이 많았다. 용두돈대, 손돌목돈대 등.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강화 12 진보(鎭堡) 중 하나다. 이곳은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 덕진진 등의 포대에서 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는데 4월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고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손돌목돈대 앞 희미한 흑백 사진에서 보이는 당시의 참혹한 패배의 모습은 나의 피를 거꾸로 흐르게 만들었다.

광성보에는 손돌목돈대의 전설이 있다. 고려 시대의 한 왕이 피난을 위해 손돌이라는 뱃사공에 의지하여 이곳을 지나다가 물살이 위태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손돌을 의심하여 참수했는데 결국 안전하게 건너온 후 왕이 잘못을 뉘우친다는 전설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는 슬픈 전설이라 사실이 아닌 그저 전설이길 바랬다. 그만큼 손돌목돈대에서 본 강화해협은 강의 간격이 좁고 물살이 빨라 배가 쉽게 지나기 어렵게 보였다. 이곳이 왜 군사의 요충지인지를 손돌목돈대는 말해주고 있었다.

강화나들길 2코스는 광성보 입구로 다시 나오지 않고도 갈 수 있게 안쪽 해안가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횡단의 첫날 아무리 늦더라도 답사하고자 했던 모든 계획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나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헤쳐 덕진진으로 향했다. 저녁 6시 반을 넘은 덕진진은 매표소는 문을 닫고 나는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신미양요 때의 격전지. 유난히 해안가에 우뚝 서있는 경고비가 눈에 들어왔다.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바다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다른 나라 선박은 지날 수 없음’

1867년 흥선대원군 명으로 강화덕진참사가 건립하였다고 써져 있었다. 이 경고비는 그 당시 혼란기의 급박한 국제정세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경고비

덕진진에서 가까이 있는 초지진에 닿으니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졌고 저 멀리 초지대교의 불빛이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초지대교 한쪽의 오래된 소나무가 초지진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낡은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렬히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미군 대령의 글)

초지진

강화해협을 따라 개화기의 슬픈 역사를 두 발로 보고 왔던 나는 초지대교를 지나 황산도 방향의 해안남로 강화나들길 8코스를 마지막 코스로 걷기 시작했다.시간은 어느덧 7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졌으니 낙조는 고사하고 걷기도 조심스러웠다. 어둠 속의 해안가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해안가는 배들도 잠들어 있었다. 나도 잠들어야 했다. 나는 강화나들길 8코스를 되돌아 나와 초지대교 못 미쳐 24시간 해수사우나에 도착했다. 밤 9시 반. 정신없이 걸은 첫날이었다. 배가 고팠지만 국토횡단 첫날을 완주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걸으며 답사했고, 걸으며 먹었고, 저녁은 참고 걸었다.

사우나 인근에는 늦은 시간이라 몇 개 있는 식당들도 문을 닫았다. 다행히 근처에 편의점이 있어 도시락으로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점심은 김밥과 인절미, 저녁은 편의점 도시락. 첫날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출발이었기에 거의 쉼 없이 11시간을 바쁘게 걸었다. 강화도 역사를 두 발로 훑어야 했기에 빠듯한 하루였다. 하지만 강화도를 언제 오늘만큼 샅샅이 훑어볼 수 있겠는가?

나는 강화도를 ㄱ자로 훑어 걸어 내려오며 42km를 4.1/1h (쉬는 시간 제외)로 걸어 국토횡단의 첫날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오전 늦게 출발했기에 맘이 급한 하루였지만 큰 무리는 없었다. 마무리 시간이 좀 늦은 것 밖에. 첫날 완주의 기쁨이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배낭을 풀고 여유롭게 내일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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