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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쫑 Apr 08. 2018

킬링필드, 죽음이 묻힌 길을 찾아

프놈펜시에서 200만 명의 학살현장មជ្ឈមណ្ឌល​ប្រល័យពូជសា

  캄보디아 하면 앙코르와트, 킬링필드일까?  킬링필드, 앙코르와트 일까? 나는 킬링필드가 먼저 떠오른다. 사실 두 단어 모두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600여 년간(802~1431) 번성하며 베트남 남부, 라오스, 미얀마, 태국의 일부를 포함하는 대 제국을 이뤘던 앙코르 왕국의 흔적이 앙코르와트다. 찬란했던 앙코르 제국의 역사와 문화는 지금은 다 소실되어 앙코르유적만이 그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킬링필드는 폴포트의 공산정권 시절(1975~1979) 크메르 루즈(붉은 캄보디아 사람이라는 뜻)가 저지른 대 학살을 말한다. 앙코르 제국의 멸망과 킬링필드는 몇백 년의 간극이 있지만 캄보디아 역사의 비극을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캄보디아 프놈펜에 와서 제일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킬링필드였다. 프놈펜 온 지 거의 한 달이 다 돼가는 이번 주말에 나는 드디어 킬링필드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것도 뛰어서.

  폴포트의 공산정권은 공산주의 이상 국가를 건설한다는 미명 하에 4년 여간 200여만 명을 죽였다. 지식인들 대부분은 물론 어린아이 부녀자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인구의 1/3에 해당된다(UN 추정). 킬링필드(집단학살지)는 전국에 388곳이며 내가 오늘 뛰어서 가는 킬링필드는 프놈펜시 외곽 "청아익" 지방에 있는 최대 규모의 학살지다.

  토요일 오후 3시 30분 나는 집을 나섰다. 프놈펜 숙소에서 킬링필드까지는 8.5km. 오전에 비가 많이 왔기에 오후에 뛰기 좋겠다 생각했는데 오전 11시쯤 날이 갠 후 달아오른 태양은 여전히 뜨겁다. 오후 3시 30분 온도는 34도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 나는 구글 지도에만 의존하여 처음 뛰어가는 길이기에 8.5km를 한 시간 정도로 잡았다. 한 시간에 뛰어 닿고 한 시간 구경 후 다시 뛰어 돌아오는 거로 3시간의 시간을 예상했다. 갈 때 한 시간을 잡았지만 중간중간 사진을 찍어야 하기에 한 시간을 넘길 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늦게 출발하면 돌아오는 시간이 어두지기에 한낮의 열기가 아직 뜨겁지만 출발했다. 선크림을 잔뜩 바르고 팔토시를 하고 선캡 모자로 얼굴, 뒷목까지 보호한다.

숙소에서 출발

  집을 나와 좁은 도로를 접어들었다. 토요일 오후 차량과 오토바이 톡톡이가 엉킨 길을 조심스럽게 갓길로 달렸다. 1km 정도를 달리다 보니 톡톡이 운전사가 뛰어가는 나를 보고 자기 차를 타고 가지 않겠냐며 호객을 한다. 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장난기 많은 동작으로 같이 뛰는 흉내를 냈다.

1.5km 지점에서 복잡한 5 거리를 지나 큰길을 건너면 작은 골목길로 접어든다. 복잡한 오거리 한편의 건물 앞 공터에서 결혼식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결혼식을 거행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결혼식 때 노천에 큰 천막을 치고 결혼식을 하며 그 자리에서 피로연도 한다. 그래서 결혼식 비용도 꽤 많이 든다. 특히 남자가 이 비용을 다 부담해야 하기에 요즘 프놈펜 같은 대도시에는 돈 때문에 결혼을 안 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결혼식 광경

  큰길을 건너 골목길 같은 좁은 길을 한참 달린다. 전형적인 대도시 외곽의 사람들 사는 모습의 길. 나는 이런 길을 1km 정도 달렸다.

주택가 골목길

  구글 지도에 보니 이 골목길을 빠져 나오면 강을 끼고 달리게 되어 있다. 한참을 달려 지도에 강이라고 표시되었던 곳에 도착한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이라기보다는 폭이 좁은 개천인데 그것도 악취와 쓰레기가 뒤범벅인 흙길이다. 흙길은 오히려 다정다감하다. 하지만 오염과 악취는 이 길을 뛰는 나에게 그다지 즐거움을 주진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도 캄보디아의 모습이거니 생각하며 뛰었다.

쓰레기와 함께 흙길을 달리다

  가끔씩 지나는 오토바이가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본다. 내가 손인사를 하면 그도 나에게 반가운 인사를 한다. 그들의 마음은 아직 오염되지 않았다. 흙길을 1.2km 정도 달리니 온갖 차들이 뒤 덤벅이 된 큰 도로다. 나는 이 길을 건너 골목길로 들어가야 한다. 죽음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갔던 킬링필드 길이 궁금했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서 곧 닥칠 죽음을 예감하며 차속에서 짧지 않은 몇십 분의 시간을 보냈으리라. 그래서 난 생각했다. 폴포트 정권이 학살지로 선택한 곳은 틀림없이 인적이 드물고 찾아가기도 힘든 외진 곳일 거라고. 내가 본 지도는 그 길을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지만 40여 년 전 당시 이 은 아마도 아무도 가지 않는 한적하고 꾸불꾸불한 숲길이었을 것이다. 큰길을 건너니 이 길이 킬링필드 가는 길이구나 느낌이 올 정도로 한적한 길이다.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킬링필드 가는 한적한 길

   나는 4km 정도를 찻길 골목길 꾸불꾸불 뛰며 와 킬링필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부터는 한 길로 계속 뛰어가기만 하면 된다. 40여 년 전 이 길은 죽음을 싣고 달리는 차량만이 다니던 공포의 길이었다. 나는 여기서 부터는 자연스레 킬링필드의 상념에 젖으며 뛰었다. 여기 오기까지는 복잡한 길을 찾아 돌고 꺾고 하면서 왔기에 킬링필드 가는 길 느낌은 없었다. 이제 나는 오늘의 목적에 맞게 뛰고 있다. 이 길은 인적은 드물고 가끔씩 가는 오토바이만이 있다. 외국인을 태운 톡톡이 한대가 내 곁을 지나갔다. 나는 뛰어 가지만 그들은 톡톡이를 이용해 프놈펜 시내에서 킬링필드를 보고 돌아 가는 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 길 중간중간 마을이 생겨 아이들 뛰어노는 모습이 여유롭다. 킬링필드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아픈 기억이어서 그런지 그들은 킬링필드에 대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이곳에 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아픈 과거는 그들의 맘속 깊은 곳에 상처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디서나 다 천진난만하다

  가다가 만나는 작은 동네에서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평상에 앉아 오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우리네 시골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들은 이 길의 아픈 역사를 알고 있는지...

정자 밑 평상의 여유

   7.5km를 뛰어왔다. 우측에 잘 지어진 공장 건물 몇채가 보이고 흰소를 몰고 오는 아이와 마주쳤다. 평화로운 광경이다. 조금 더 뛰던 나는 뛰던 발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킬링필드 위령탑이 보였다. 킬링필드의 영혼들을 위해 무슨 위로라도 한마디 해야 할거 같았다. 하지만 난 멀리서 그저 물끄러미 위령탑만 바라 보았다. 킬링필드의 무거움이 한순간 밀려들었다.

흰소와 아이

  4km 정도 뛰어온 이 길은 차량이 다니지 않는 길이다. 40여 년 전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는 숲길었으리라. 학살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왔던 이 길은 사람 눈에 뜨이지 않는 길이었기에 학살의 장소로 선택했을 것이다. 킬링필드는 원래 캄보디아에 사는 중국인 화교들의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킬링필드에 도착했다. 내가 본 킬링필드를 간단히 적어 본다. 적는 맘은 무척이나 무겁다.

킬링필드 "청아익"은 가장 많은 사람이 학살된 곳으로 아직까지도 발굴이 이뤄지고 있고 어떤 곳은 발굴을 포기하고 큰 무덤으로 만들어 덮어져 있다. 킬링필드는 너무나 경건한(?) 곳이기에 보는 내내 웃을 수도 없고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도 다니는 중에 뼈 등 사람의 잔해가 나오면 사무소에 알려 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올 정도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모신 위령탑

  입구에서 들어서니 위령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잠시 묵념을 한 나는 신발을 벗고 위령탑에 들어가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많은 해골이 마치 나를 보고 인사하는 듯 했다. 미리 들어본 안내방송에서 해골의 깨진 모양에 따라 곡괭이로 맞아 죽은 사람, 망치로 맞아 죽은 사람 등을 구분할 수 있다는 데 나는 차마 그걸 구분해서 보기 위해 오래 볼 수가 없었다.

아~~

   위령탑을 나와 나를 더 슬프게 만든 것은 집단으로 묻어 매장했던 그곳이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푹 파인 웅덩이는 수많은 사람이 묻혀 생매장당했던 곳인데 들판 곳곳에 이런 수많은 구덩이를 다 보는 것이 비극이었다. 어떤 곳에서는 지금도 살려달라는 소리를 들리는 듯했다.

집단 학살 구덩이

  어떤 곳은 몇백 명을 한꺼번에 묻어 죽였다고 쓰여 있다. 그 좁은 구덩이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집어넣고 묻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좁은 곳인데 말이다.

이 곳은 450명이 묻혔다

  한 시간 정도 둘러보고 난 잠시 숨을 고르며 이곳에 온 의미를 생각했다. 인간의 잔혹함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생각해 봤다. 석양에 비친 나무의 얽히고 섥인 모습만큼이나 나의 맘도 복잡했다.

킬링필드 안의 나무

   돌아갈 시간이 되어 나는 킬링필드를 나왔다. 시간은 오후 5시 35분. 뛰어서 온 길을 그대로 뛰어가면 되니 올 때 처럼 헤매거나 할 일은 없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겁다. 킬링필드 문을 나왔다고 그 아픔을 단번에 털어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천천히 뛰었다. 빨리 뛰고 싶지도 않았다. 그나마 저 멀리 비추는 석양이 나를 위로하는 듯 했다. 죽음을 앞두고 끌려오던 그들이 바라 본 석양은 어땠을까...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멈춰지고 천천히 걸었다. 슬픈 생각이 밀려들었다. 왜? 왜? 이렇게 죽임을 당해야 하나. 우리는 남을 위해 살긴 어렵더라도 최소한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서는 안된다. 착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 그런 캄보디아를 바라며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공터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바라는 모습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맨발의 아이들과 나무 골대가 정겹다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니 빨리 뛰어야 했다. 킬링필드 가는 외길을 벗어나 큰 도로 지나 다시 쓰레기와 악취가 진동하던 흙길을 달려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이제 2.5km 정도 더 가면 된다. 그런데 올 땐 한적했던 그 길이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시장 골목이 북새통이다. 걸을 수 없을 정도다. 나는 이리저리 달려 시장통 골목길을 나왔다.

저녁 시간 북생통 시장길

  집에 도착하니 6시 43분. 오늘은 킬링필드 초행길이고 캄보디아에서 외곽으로 처음 나가보는 거라 빨리 뛰기보다는 길을 헤매지 않고 안전하게 뛰는 걸 우선으로 했다. 프놈펜시 외곽은 농촌은 아니다. 공장도 많고 보통 사람들 사는 그런 곳이다. 뛰는 동안 경치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 사는 모습에서 위안을 삼았다. 아이들,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나는 행복을 봤다.

  하지만... 킬링필드를 보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내내 무거웠다. 이런 참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잔혹함에 몸서리친 하루였다. 오늘 달리기는 내가 달린 기억 중에서 가장 힘든 시간으로 기억될 거 같다. 몸이 힘든 게 아니라 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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