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24일간 걸어 국토 1000km를 종횡단한 58살 청년 이야기
2일 차 2017. 6. 5. 경기도 고양시 공릉천변 공원-광화문광장-서울 강변역 (35.1km)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쏟아지던 별들은 온데간데없고 따사로운 햇살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대지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눈을 뜨자 나는 텐트 안에 누워있던 내 모습에 익숙지 않아 놀란 듯 텐트 밖으로 막 나왔던 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땐가 친구들끼리 싸구려 텐트 하나 들고 경기도 가평 어디 강가에서 야영을 한 적이 있었다. 네 놈 이서 돈 없이 객기 하나로 떠난 야영이었기에 2~3인용 텐트에 구겨져 들어가 잤던 기억이 난다. 난 어제 비록 한 평이 채 안 되는 야외의 잠자리였지만 혼자만의 공간에서 맘껏 나를 꿈꾸며 잤다. 너무나 오랜만이었던 나만의 밤이었다. 5시 반에 일어나 바라본 이곳의 아침은 마치 내가 아침 태양을 처음 보는 사람인양 모든 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오늘 아침에 만난 이런 분위기가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이내 나는 감사한 맘으로 자연에 다가갈 수 있었다. 순간 내가 그간 너무나 많은 것을 잊고 살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국토종횡단 도보여행에서 나는 두 가지 원칙만은 철저히 지키기로 나 자신에게 약속했다. 첫째는 어떤 경우라도 차는 타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일의 목적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일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침 7시 전에는 출발하는 것이 좋다. 당일 목적지를 당일에 도착해야 하는 것은 다음날의 순조로운 일정을 위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게 필요했다.
장거리 도보에서는 아무리 급해도 아침에 뭔가는 먹어줘야 한다. 내가 잤던 이곳은 식수가 없었다. 나는 어제 먹다 남은 물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이를 닦은 후 남는 물로 라면 하나를 끓였다. 오늘 아침은 대충 먹고 대충 씻어도 된다. 왜냐하면 서울 시내를 걸어서 관통할 거기에 점심 먹을 데는 천지일 테고 오늘 저녁은 집에서 묵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배낭을 꾸리니 6시 30분, 나는 고양시 공릉천변 공원을 걸어 나와 어제 걸었던 통일로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2일 차 걷기가 시작되었다. 어제 하루 학습이 되었는지 발걸음도 가볍고 배낭도 제법 한 몸처럼 익숙해졌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국토종단 14일 중 유일하게 하루 집에서 묵는 날이기에 하루만의 귀가인데도 무척이나 들뜬 기분이었다. 아내와 두 딸이 버선발로 나와 반겨줄걸 생각하니 마음은 벌써 집에 도착한 듯했다. 통일로의 아침은 상쾌했고 서울로 출근하는 차들인지 승용차들이 분주하게 서울 방향으로 내달렸다. 흔히들 벽제화장터로 알고 있는 서울시립승화원을 지나니 새로운 신도시가 앞에 나타났다 삼송신도시. 이렇게 많은 아파트가 들어섰다는 것은 서울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게다. 하지만 왠지 늘어나는 아파트 숲이 건조한 현대인의 삶을 얘기하는 것 같아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건 도보 환경이 자연을 벗어나 건조한 도시 속으로 들어간다는 걸 의미했다. 조금 걸으니 숫돌고개다. 고개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긴 언덕이라는 표현이 맞을듯하다. 예전엔 이 고개 정상에 숫돌이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텐데 지금은 숫돌의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숫돌 하면 어린 시절 동네를 돌며 외치던 칼 가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칼이나 가위 갈아요~~ 금이빨 팔아요~~’ 숫돌이란 게 지금은 가정에서 거의 쓰질 않지만 예전엔 부엌의 필수품이고 농사의 필수품이었다. 벼나 풀을 베기 전 어르신들은 안마당에 앉아 두 무릎을 곧추세워 숫돌 받침목을 두 발로 누르고 낫을 갈곤 했는데 이때 부엌의 아낙들은 ‘가는 김에 칼도 같이 갈아주쇼‘ 하고 부엌의 칼도 내오곤 했다. 어르신이 낫을 간다는 것은 논이나 들로 곧 일 나간다는 예고기도 해서 일하기 싫은 눈치 빠른 집안 사내놈들은 미리 뒷문으로 줄행랑을 치곤했다. 중국의 천재 시인 이태백이 유랑하던 시절 쇠절구의 쇠공이를 열심히 숫돌에 갈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뭐 하러 그걸 그렇게 열심히 갈고 있냐고 물었더니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얘기가 있듯이 숫돌은 우리네 삶에서 충직과 노력을 비유하는 말로 많이 사용됐다. 나는 지금 충직하게 숫돌고개를 걷고 있다.
숫돌고개를 넘으니 서울이 성큼 눈앞에 다가왔다. 북한산의 아침 경치가 한눈에 펼쳐졌다. 서울 경계선을 넘어 얼마 안가 나는 구파발에 도착했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8.3km를 걸어왔다. 아침의 발걸음은 늘 가볍다. 그래서 컨디션이 좋은 오전에는 속도를 내어 걷는 게 필요하다. 아침 8시 좀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연신내, 불광동 방향으로 가는 도로는 출근 차들로 꽉 막혀 있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차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면 앞서 가던 차들이 서있고 나는 그 차를 다시 앞질러 걷고. 어떤 땐 걷는 내가 더 빠르니 나보다 뒤처져 서있는 차들을 보면서 희열이 느껴졌다. 출근시간은 다가오는데 도로가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속만 태웠던 그때가 생각났다. 젊은 시절에는 정말로 옆은 안 보고 앞만 보고 달렸다. 하지만 지금 나는 차밖에 있다. 옆도 보고 뒤돌아도 본다. 걸으며 차도에 줄지어 서있는 차들을 보니 순간 해방감이 밀려왔다.
난 서울에 오래 살아 서울이 익숙한듯하지만 오히려 더 익숙하지 않다. 특히 주로 한강 이남에서 살다 보니 지금 걷고 있는 통일로에서 이어진 이 길, 의주로의 이름은 더욱 섧다. 옛날 경성을 거쳐 신의주까지 가는 길에서 유래했다는데 이번에 걷기 전 조사를 통해 이 도로명도 알게 되었다. 모르고 걸을 때와 신의주로 통하는 길이라는 걸 알고 걷을 때의 느낌의 차이는 컸다. 분단의 인식이 없어지고 마치 맘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신의주까지 걸어갈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꽃의 이름을 알면 그 꽃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서울의 많은 지명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요즘 서울 사람들은 지하철 역명을 통해 그 지명에 더 익숙하고 지하철을 타느라 거의 땅속으로만 다니기에 그저 지하철역 밖의 옛 모습을 상상해볼 뿐이었다.
연신내 지나서 불광동으로 가는 도로는 이젠 출근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눈에 띄게 차량이 줄어들었다. 서울이란 데는 본래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니 아무도 나의 행색을 보고 쳐다보거나 묻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시간에 이리 다니니 실업자 아니면 팔자가 좋아 평일에도 산에 다니는 사람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겠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게 걷기엔 편하다. 서울 접어들어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든 게 바쁘다는 것이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나 차량 등 모든 게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고 왠지 모르게 분주하다는 느낌이다. 하긴 나도 그 안에 있었을 땐 그렇게 살았다.
홍은동 사거리를 지나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아침 6시에 먹은 라면 한 개가 전부니 그럴 만도 했다. 오전 11시도 안되었는데 지금 밥을 먹는다면 오후는? 하지만 오늘은 저녁을 집에서 먹을 계획이기에 좀 일찍 점심을 먹는다고 한들 큰 문제는 없겠다 싶었다. 나는 오늘 집 도착을 오후 5시 반으로 잡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길가 콩나물해장국집이 있어 들어갔다. 어제 점심도 콩나물비빔밥이었는데 이틀 연속 점심은 콩나물인 셈이었다. 콩나물이 아스파라긴산이 함유되어 간 해독에 좋고 콩나물의 레시틴 성분은 혈액순환에도 좋다고 하니 오래 걸어야 할 나에겐 몸보신도 좋겠지 싶어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국물 째 다 비웠다.
“재“ ”령“ ”현“ 하면 무슨 고개 길이 연상된다. 나는 이번 도보여행에서 무수히 많은 고개를 걸어서 넘었다. 그 고개 길들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무악재는 안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고개로 무악재라고 불리게 된 것은 조선 초기에 도읍을 정하면서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 삼각산의 인수봉이 어린아이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라고 하여 이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안산을 어머니의 산으로 삼아 무악(毋岳)이라 하였고 이 고개를 무악재라고 하였다고 한다. 무악재를 넘다 보면 이 고개가 무악재인지 모르게 그냥 지나치게 된다. 그만큼 평범한 고개이기 때문이었다. 무악재 정상에 다다르니 우측 안산 밑에 이 고개가 무악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인데 나에겐 무척이나 감동으로 다가왔다. 요즘 서울 사람들 중 이 고개를 걸어 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이며 무악재 사연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오히려 무악재역으로 더 기억하고 있을 테지. 무악재 표지석은 한쪽에 무척이나 외롭게 서 있었다. 산비탈 아래 마치 버려진 듯 서있는 표지석도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지 혼자 걷는 내 처지와 같은 생각이 들어 동병상련의 정이 느껴졌다.
무악재를 넘으니 오른쪽 저 멀리 서대문독립공원이 보였다. 나는 오늘 이 공원에서 한 시간 정도 쉴 계획이다. 출발지 경기도 고양시 공릉천변 공원에서부터 서울 서대문독립공원까지는 17.5km. 지금 시간은 오전 11시 50분. 나는 대략 한 시간에 4km로 속도로 걸어왔다. 서울에 진입해서는 횡단보도나 지하보도를 건너야 하는 등 도보 환경이 좋지 않아 빠르게 걸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걷는 재미가 덜하다는 의미도 되겠다. 오늘은 이곳 서대문독립공원을 비롯하여 서울 시내를 관통하면서 들러볼 곳들이 많아 오후에는 그런 시간도 충분히 고려해서 일정을 짰다.
서대문독립공원에는 옛 서대문형무소가 있던 자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서울에 살면서도 이곳을 보기 위해 와본 적이 없다. 가끔 버스 타고 독립문을 치나 치며 멀찍이서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 건물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두 달 전 나는 이번 1,000km 국토종횡단을 준비하며 훈련의 일환으로 참석한 100km 울트라마라톤대회에서 이곳을 지나간 적이 있다. 이곳은 최종 목적지 종로 조계사를 3km 앞둔 97km 지점이었다. 전날 오후 5시에 출발하여 밤새 달려 오전 10시까지 조계사에 도착해야 하는 코스에서 아침 7시 반쯤 이곳을 지나던 나의 몸은 걷기도 힘들 정도의 극심한 한계점에 달해 신체 시스템이 거의 작동을 멈춘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남은 3km를 기다시피 하여 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서대문독립공원의 독립문을 바로 옆에 두고 뛰었는데도 독립문이 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나는 온몸의 에너지가 방전된 상태였다. 그래도 어찌해서 완주는 했으니 지금은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은 잊게 되고 뿌듯함만 기억이 난다.
서대문형무소는 아쉽게도 월요일이라 휴관이었다. 나는 서대문형무소 소개 글을 천천히 읽으며 잠시 아픈 역사의 순간으로 되돌아가 보았다. 뭔가 모를 뭉클함이 올라왔다. 분노.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기에 서대문 형무소 앞의 소개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옛 서울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일제가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만든 감옥이다. 처음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는데 서대문 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등으로 바뀌다가 1967년에는 서울구치소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되었고 광복 후에는 반민족 행위자와 친일 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이후 군사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이후 생략)”
일제 강점기의 형무소가 해방 후에도 그대로 잔존하며 정권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게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붉은 담벼락에 귀를 대보니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마치 그 당시 고문에 울부짖는 신음소리처럼 들렸다. 언젠가 중국 하얼빈 외곽의 일본 731부대 전시관을 간 적이 있었다. 731부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여 내부에 전시한 일본의 만행들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처참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와 731부대, 이곳과 하얼빈에서의 기억이 오버랩 되며 나는 잠시 치를 떨었다. 이런 역사는 잊혀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나는 서울에 살면서 오늘에야 이곳에 와봤으니 선열들께 왠지 죄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대문형무소 붉은 담벼락을 천천히 돌아 걷다가 아래로 몇 걸음 걸어 내려와 나는 독립문 앞에 섰다. 독립문의 웅장함을 보니 맘이 한결 가벼워졌다. 감옥, 독립이라는 두 개의 대비되는 장면을 마주하며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한편의 짧은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독립문 옆의 나무 그늘아래 잔디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아침 6시 반에 걷기 시작하여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식당에 앉은 시간을 빼고는 처음 갖는 편안한 휴식이었다. 배낭은 물론 운동화, 양말도 벗고 다리를 쭉 뻗고 잔디에 앉았다. 독립문사거리 도로에는 무수히 많은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바로 그 대로변 안쪽 공원에서 한낮에 이런 휴식을 취한다는 게 꿈만 같았다. 공원 안의 나와 공원 밖의 사람들. 난 잠시 도시 안의 틀을 깨고 밖으로 나와 도시 안에 갇힌 사람들을 보았다. 도시 밖 다른 세계에서 한 시간의 달콤한 휴식을 마친 나는 다시 도시 안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사직터널을 지나 광화문으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