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으로 말한다. 12월 셔츠는 위험하다.
"그럼에도 나는 셔츠를 입는다."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셔츠는 기능성 옷이 아니다. 히트텍처럼 보온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냉장고 바지처럼 막 입을 수 있는 garment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셔츠를 입는다. 일종의 의식행위가 얽혀있기에 입곤한다. 셔츠는 몸통과 팔의 봉제선과 손목 그리고 가슴의 조임새를 조절하기 위한 단추 기능이 주어진다. 티셔츠처럼 무식한 garment와는 달리 꽤나 복잡하고 조잡하다. 또한 잘 늘어나지도 않기 때문에 체중이 불거나 몸집이 커지면 기존 셔츠는 무조건 버릴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셔츠를 입는다. 일종의 의식행위가 얽혀있기에 입곤한다. 셔츠는 정갈함이란 늬앙스를 함축하고 있다. 요즘처럼 공부에 몰두하는 내겐 특히나 매혹적인 늬앙스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나는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날엔 와이셔츠에 니트를 받쳐입는다. 평소 대로라면 히트텍 2장을 겹쳐 입고 그 위에 후리스 후드를 받쳐입는 나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셔츠를 입는다. 일종의 의식행위가 얽혀있기에 입곤한다. 12월에 셔츠를 입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단추 사이에 들어오는 칼바람은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설마 셔츠 속에 새하얀 내의를 입고 당당할 수 있는가? 취향의 차이겠지만 나는 셔츠 속에 내의를 입지 않는다. 셔츠 특유의 심플함과 당당함이 왜곡될 수 있어서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셔츠를 입는다. 일종의 의식행위가 얽혀있기에 입곤한다. 특히, 심적으로 힘들때 셔츠를 입는다. 다시 수험생이 된 '나'를 바로잡아줄 수 있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돈을 주고 감시관을 둘 것도 아니고, 학교 다닐때처럼 동기들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욱 무방비상태였다. 바로 이 때 나타난 것이 셔츠였다. 셔츠를 통해 조금 '괜찮은 사람' 혹은 '열심히 하는 사람' 처럼 코스프레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 다니던 시절. 지겹게 입엇던 셔츠는 이제선 '근면'의 아이콘 혹은 '꾸준함'의 증표 정도로 의미심장해졌다.
경험의 축적이라는 것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뇌인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일상인데, 복장 하나로 스스로를 움켜쥐는 것이 '셔츠' 따위라는 게 놀랍다.